영국 유명 방송인 에스더 랜천(84)은 지난해 12월 ‘조력 사망’(assisted dying)을 지원하는 스위스 단체 ‘디그니타스’(Dignitas)에 가입했다고 밝혔다. 폐암 4기인 그는 “조력 사망이 합법인 스위스 취리히로 떠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스럽게 죽는 것을 지켜보면 그 기억이 행복했던 (다른) 모든 시간을 지워버린다. 나에 대한 가족들의 마지막 기억이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라고 말했다.
영국은 조력 사망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에 랜천처럼 외국인도 조력 사망을 선택할 수 있는 스위스행을 희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국인 중에도 스위스 조력 사망 지원 단체에 가입하거나 실제로 스위스에 가서 이를 실행한 이가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국 현행법상 동행한 가족의 경우 자살방조죄로 처벌될 수도 있는 논쟁적 사안이다.
21년간 영국 공영방송 비비시(BBC)에 출연해온 방송인이자, 노인과 고독 관련 자선단체를 설립한 사회운동가이기도 한 랜천은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나고 싶은지에 대한 선택권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5일 93살 동갑내기 부부였던 드리스 판아흐트 네덜란드 전 총리와 아내인 외제니 여사가 동반 안락사한 사건은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판아흐트 전 총리는 2019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거동이 불편했고 아내 역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부부는 의사의 도움으로 자택에서 함께 숨을 거뒀다.
2002년 안락사를 법적으로 허용한 네덜란드는 △고통이 크고 견딜 수 없는 경우 △합리적 해결책이 없는 경우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한 경우 등 6가지 조건에 부합할 때 의사가 직접 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해 안락사를 시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는 환자가 직접 링거의 약물 투입 버튼을 누르는 방식 등으로 마지막 실행을 하는 조력 사망보다 의사가 더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형태다. 네덜란드에서는 지난해 4월 12살 이하 불치병 아동도 부모 동의 아래 안락사를 택할 수 있도록 법 적용 범위를 확대했다.
세계적으로 개인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지는 오랜 논쟁거리였으나, 이를 엄격한 요건 아래 허용하는 나라가 늘고 있다. 스위스는 안락사의 일종으로도 분류하는 조력 사망을 1942년부터 허용했다. 2002년에는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의사가 직접 약물을 주입하는 형태의 안락사까지 법적으로 허용했다. 미국은 1997년 오리건주를 시작으로 올해 초 기준 11개 주에서 안락사 또는 조력 사망을 허용하고 있다.
2016년 안락사를 허용한 캐나다에서는 지난해 세계 최초로 정신질환자도 안락사를 택할 수 있게 허용했다. 2020년 뉴질랜드는 국민투표를 통해 안락사를 허용하기도 했다. 안락사나 조력 사망을 도운 이(의사, 가족)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에 위헌 결정을 내리는 방식으로 우회적으로 길을 터준 나라들도 있다. 2019년 이탈리아, 2020년 독일과 오스트리아, 2024년 에콰도르 등이 이에 해당된다.
안락사나 조력 사망을 현재 금지하는 나라에서도 논쟁이 번지고 있다. 영국은 안락사를 도울 경우 현행법상 살인죄 등으로 처벌될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이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방송인 랜천과 지지자들은 올해 1월 ‘조력 사망에 관한 의회 표결 실시에 관한 청원’을 제기했고, 시민 15만명 이상이 지지 서명을 했다. “임종이 임박했지만 판단이 분명한 불치병 환자가 자신의 의지에 반해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어서는 안 된다”며 “영국 하원에서 조력 사망이 충분히 논의될 수 있도록 시간을 배정하고 의원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영국 하원은 10만명 이상의 서명을 얻은 청원에 관해 토론을 진행해야 한다.
앞서 지난달 29일 영국 하원 보건사회위원회는 ‘조력 사망에 관한 보고서’를 발간했다.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시민사회 권고에 따라 가까운 미래에 영국이 조력 사망을 허용할 가능성이 커졌으며, 장관들은 다양한 입법의 차이를 어떻게 법안에 반영할지 적극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프랑스에서도 최근 법 개정 논의가 일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지난 2005년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했지만, 스위스와 같은 조력 사망이나 네덜란드와 같은 형태의 안락사는 허용하지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2022년 9월 184명으로 구성된 국가 자문단이 보고서를 내어 “현재 프랑스의 임종 지원에 대한 접근성이 불평등하며, 특정 임종기 상황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응이 부족하다”며 “프랑스의 현 임종 지원 체계가 더욱 진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정부는 아직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달 8일 엘리제궁에서 의사, 철학자, 종교인 대표들을 만난 뒤 “이 주제가 위협적”이라며 민감한 사안임을 인정했다.
프랑스가 준비 중인 법안은 올해 여름께 윤곽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일 마크롱 대통령은 미뤄온 법안을 오는 5월 중 완성해 의회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리베라시옹 등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새 법안에는 불치병이나 극심한 통증으로 고통받는 환자에게 조력 사망을 허용하고 임종 지원을 다양화하는 내용이 담길 것이지만, 의사가 직접 치명적 약물을 투여하는 형태의 ‘안락사’는 허용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르몽드는 전망했다.
그러나, 안락사나 조력 사망을 허용하고 폭을 넓히자는 최근의 흐름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미성년자, 장애인, 정신질환자 등의 경우 돌봄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는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다. 영국의 조력 사망 반대운동단체 ‘케어 낫 킬링’(Care Not Killing)의 고든 맥도널드 박사는 최근 비비시에 “조력 사망 허용 대상자 기준이 불치병 환자뿐만 아니라 장애인이나 (스스로 의사 결정이 어려운) 치매 환자, 우울증 환자 등에게까지 확대될 수 있다”며 영국에서 조력 사망을 허용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적절한 돌봄을 받을 수 있다면 안락사를 원하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며 “양질의 돌봄 서비스가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락사를 허용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느 시점에서 치료를 중단하고 안락사를 허용할지, 환자의 희망이 진정한 의지인지 사회적 압력으로 인한 것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는 이들도 많다.
안락사를 반대하는 이들은 호스피스(임종 간호)에 대한 접근권을 포함한 고통 완화 치료 확대가 안락사 허용보다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호스피스는 임종을 앞둔 환자의 신체적 고통을 완화하는 데 중점을 둔 의료 지원을 말한다. 법 개정을 고민하는 영국과 프랑스 정부도 완화 의료의 접근성 강화 방안을 새 법안에 대폭 담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 가브리엘 아탈 프랑스 총리는 올여름 발표될 법안에 대해 “완화 의료가 상당히 강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국 하원 보건사회위원회도 지난달 발표한 보고서에서 “영국에서 지역에 따라 호스피스 접근성에 격차가 크다”며 “환자들의 호스피스 접근성을 높일 방안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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