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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여행]

나치가 좋아했던 브루크너 vs 금지 당했던 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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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독일은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우며 예술과 문화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선전하고 대중을 통제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 음악을 좋아했던 히틀러는 자신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반영하는 음악을 적극 장려하고 라디오를 통해 반복해 방송하도록 했다. 반면 나치의 이념과 반대되는 음악은 퇴폐적이라는 낙인을 찍어 철저하게 탄압했다. 연주와 방송을 금지시켜 아예 사라지도록 검열과 통제라는 방법을 썼다.

독일 전통 문학에서 연원해 애국심과 영웅주의를 강조하는 가사와 웅장한 멜로디를 갖고 있어 나치의 이념에 부합한다고 판단된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리하르트 바그너, 요하네스 브람스, 안톤 브루크너 등이 있다. 군사 행사와 각종 선전 행사에서 군악대 음악을 효과적으로 사용해 군사적 힘과 규율을 강조하며, 대중을 고무시키고 나치에 대한 충성심을 불러일으켰다. 오페라 역시 마찬가지였고, 영화나 올림픽도 대중선전에 이용했다. 

반면 나치가 싫어하는 음악 또한 존재했다. 재즈는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인종적으로 열등한 흑인들의 음악이라는 이유로 재즈 음악을 금지했고, 백인 유럽 재즈 음악가들까지 탄압했다.

나치는 멜로디와 조성이 모호하여 분명한 음악적 메시지를 느낄 수 없는 무조음악과 표현주의 음악 등의 현대음악을 ‘퇴폐적’이고 ‘비독일적’이라고 비판했다. 전통적인 가치와 질서를 위협하는 현대음악의 범주에는 말러의 제자들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 등이 포함돼 있다.

당연하게도 나치는 유대인 음악가들이 작곡한 음악을 금지했다. 유대인의 음악을 "유대인의 음모"의 일환으로 여겼던 그들은 멘델스존(Mendelssohn), 마이어베어(Meyerbeer), 말러, 크레넥 등을 그 리스트에 올렸다. 지휘자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와 브루노 발터(Bruno Walter)도 독일에서 추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반작용으로 2차 대전 후, 나치에 의해 홀로코스트(Holocaust)를 겪은 이스라엘에서 연주가 금지된 독일음악들도 있었다. 바그너는 당연히 제1순위였으며, 나치 당원으로 독일 제국음악협회 회장이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와 반유대주의자 한스 피츠너(Hans Pfitzner), 나치의 선전 영화에 음악을 작곡한 카를 오르프(Carl Orff), 히틀러 청년단의 음악 감독을 맡았던 베르너 에크(Werner Egk) 등이 그 대상이었다.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는 직접적으로 나치와 관련된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의 음악이 나치즘의 상징으로 여겨져 이스라엘에서 일부 작품들이 금지된 바 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먼저 연주된 독일음악은 베토벤과 바흐였고, 뒤를 이어 차츰 해금되기 시작해 1990년대에는 몇몇 작품들 말고는 거의 풀렸다. 특히 1996년 11월 지휘자 주빈 메타(Zubin Mehta)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이스라엘 필하모닉과 연주한 것은 논쟁의 중심이 되었으나 이후 '음악은 음악, 정치는 정치'라는 분리 인식이 확산됐다.

정치와 음악의 혼합은 우리나라에서도 남아있는 과제다. 김순남 등 월북 음악가들에 대한 평가 문제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았고, 중국 공산당에서 활동한 정율성 기념공원 논쟁도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진행중이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린츠의 안톤 브루크너 음악대학 전경


사후에 히틀러의 총애를 받았던 브루크너

 

요제프 안톤 브루크너(Joseph Anton Bruckner·1824~1896)는 62세가 되던 1886년 7월 오스트리아 황제로부터 프란츠 요제프 훈장을 수여받았다. 1890년대 초 브루크너는 유명하고 명예로운 인물이 되었고, 1891년 비엔나 대학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892년에는 68세의 나이로 빈 대학에서 은퇴했다. 그는 여전히 진지한 음악적 태도와 경건한 삶으로 존경받았다. 브루크너는 1896년 세기가 바뀌기 전 빈에서 72세에 독신의 몸으로 사망했다. 그는 장크트 플로리안(Sankt Florian)에 있는 수도원 교회의 그가 가장 애착하던 오르간 바로 아래에 묻혔다. 

그의 고향인 안스펠덴과 가까운 린츠의 음악, 연극, 무용을 위한 안톤 브루크너 사립대학은 1932년부터 2004년까지 린츠 브루크너 음대로 명명되었다. 린츠의 교향악단도 브루크너 오케스트라 린츠(Bruckner Orchestra Linz)가 되었다. 

브루크너가 죽은 지 30여 년 후, 나치는 브루크너의 음악이 독일 대중의 시대정신을 표현하고 있다고 판단해 브루크너 음악의 부흥을 시도했다. 아돌프 히틀러 총통은 특히 브루크너에게 각별했다. 그는 1937년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발할라 사원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특별히 브루크너의 흉상을 기념하기도 했다. 브루크너의 음악에 매료된 히틀러는 브루크너가 오르간을 연주했고 그가 묻힌 린츠의 성 플로리안 수도원을 브루크너의 원고 보관소로 개조할 계획을 세웠다. 히틀러는 수도사들을 건물에서 쫓아낸 후 오르간 복원 비용과 브루크너 연구소 설립 비용을 개인적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출판할 작품들의 수집 비용과 자료구입비까지 책정했다.

브루크너 흉상에 경의를 표하는 히틀러의 사진

 

1943년 가을 히틀러는 브루크너 심포니 오케스트라(Bruckner Symphony Orchestra)를 창립하여 창단공연을 열었다. 린츠의 종탑 중 하나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4번의 주제를 연주하려는 계획도 세웠으나, 패전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브루크너 교향곡 7번 중 2악장 아다지오는 1945년 5월 1일 히틀러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독일 제국라디오(Deutscher Reichsrundfunk)를 통해 방송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그의 음악에 대한 히틀러와 나치의 선호에도 불구하고 종전후 브루크너 음악이 평가절하 되지는 않았다. 나치 독일과 맞서 싸운 연합군인 유럽과 미국의 여러 영화와 TV 제작물에서는 그의 음악을 발췌해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도 브루크너의 음악을 금지한 적이 없으며 심지어 주빈 메타(Zubin Mehta)와 함께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을 녹음하기도 했다.


오늘날 그의 길고도 압도적인 음향으로 가득 찬 교향악을 좋아하는 팬들은 독일음악을 대표하는 3B(Bach, Beethoven, Brahms)에 하나의 B를 더한다면 그것은 브루크너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한다. 브루크너는 그 만큼 20세기 후반부터 그의 가치를 재평가받고 있다. 

 


사후에 나치에게 금지를 당했던 말러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1860~1911)는 아내인 알마 덕분에 음악의 영감을 공급받았지만, 아내에 대한 집착은 그의 신경증적인 성격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1907년 여름, 빈에서 벌어진 말러 축출 운동에 지친 그는 가족을 마이어니그(Maiernigg)로 데리고 갔다. 도착 직후 두 딸은 성홍열과 디프테리아에 걸렸다. 둘째 안나는 회복되었지만 2주 간의 투병 끝에 첫째 마리아 안나(애칭 Putzi)는 세상을 떠났다. 이 엄청난 상처후, 말러는 자신의 심장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빈의 전문의는 그의 심장병을 확진하며, 모든 형태의 격렬한 운동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이 일로 인해 말러는 무기력증에 빠졌다. 말러 가족은 마이어니그를 떠나 나머지 여름을 슐루더바흐(Schluderbach)에서 보냈고, 이해 말 뉴욕으로 떠났다.

말러는 1908년 새해 첫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뉴욕에 데뷔했고, 호평 속에 분주한 첫 시즌을 보냈다. 여름 휴가차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말러는 티롤의 토블라흐(Toblach) 근처 숲속에 있는 3번째이자 마지막 작곡 스튜디오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그는 고대 중국 시를 바탕으로 한스 베트게(Hans Bethge)의 텍스트를 사용하여 <대지의 노래>(Das Lied von der Erde)를 작곡했다. 작품의 교향곡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말러는 동료 작곡가인 베토벤, 슈베르트, 브루크너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믿었던 "교향곡 9번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 번호를 부여하지 않았다. 1908년 9월 19일 프라하에서 열린 교향곡 7번의 초연은 알마 말러의 표현에 의하면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1908~1909 시즌 동안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의 경영진은 말러보다 7년 후배인 이탈리아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1867~1957)를 영입했고, 말러는 전체 시즌 동안 단 19번만 지휘했다. 시즌 초반에 뉴욕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세 번의 콘서트를 지휘하며 좋은 인상을 받았던 말러는 메트 오페라를 사임하고 개편된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자 직을 받아들였다.

말러의 지휘하에 리허설을 진행하는 뉴욕 필하모닉 사진.


1909~1910년 뉴욕 필하모닉 시즌에 말러는 46번의 콘서트를 지휘했지만 그의 프로그램은 대중의 취향에 비해 너무 까다롭게 받아들여졌다. 1909년 12월 미국에 데뷔한 그의 교향곡 1번은 비평가와 대중에게 어필하는 데 실패했고, 막대한 재정적 손실로 귀결됐다.  

1910년 9월 뮌헨에서 열린 교향곡 8번의 초연은 그의 생애 마지막 작품 초연이었다. 알마가 젊은 건축가 월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와 불륜을 시작한 것을 눈치챈 말러는 고민 끝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에게 조언을 구했다. 프로이트는 음악적 재능을 지닌 알마에게 말러가 작곡의 포기를 종용함으로써 나타난 욕구불만이라고 진단했다. 말러는 이를 받아들여 알가마 곡을 쓰도록 격려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그녀의 작품 중 일부를 편집하고 편곡하고 홍보하기도 했다.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교향곡 8번은 알마에게 헌정되었고, 작품은 말러의 생애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감정적인 불편함을 안고 말러는 1910년 여름 교향곡 10번을 완성해 10월 말에 뉴욕으로 돌아왔다. 콘서트와 투어로 바쁜 필하모닉 시즌에 전념하던 말러는 크리스마스 무렵부터 목이 아프기 시작했고, 그 증상은 계속되었다. 1911년 2월 21일, 체온이 40°C까지 오른 말러는 카네기 홀에서 부소니(Busoni)의 ‘슬픈 자장가’(Berceuse élégiaque)의 세계 초연을 포함한 공연을 지휘했는데, 이것이 말러의 마지막 연주회였다.


몇 주 동안 병상에 누워있던 말러는 세균성 심장내막염 진단을 받았다. 그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콘서트 시즌 재개에 대한 의지를 표현했다. 1911년 3월 3일 소프라노 프란시스 알다(Frances Alda)의 공개 연주회에서 알마의 작곡 중 하나가 연주되는 것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4월 8일 말러 가족은 배를 타고 유럽으로 떠났다. 열흘 뒤 파리에 도착한 말러는 뇌이(Neuilly)에 있는 병원에 입원했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5월 11일 빈에 있는 뢰브(Löw) 요양소로 이송된 말러는 폐렴까지 발병해 혼수상태에 빠졌다. 일주일 후 그는 숨을 거뒀다.


말러는 유언대로 그린칭 묘지(Grinzing cemetery)의 첫딸 마리아 안나 옆에 묻혔고, 묘비에는 이름만 새겨졌다. "나를 찾으러 오는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 알 것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알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알마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 브루노 발터 등 음악가와 화가 클림트(Gustav Klimt)를 포함해 유럽의 오페라극장 대표들이 참석했다. 알마는 1940년에 <구스타프 말러: 추억과 편지>라는 회고록을 출판했다. 전기 작가들은 이 회고록에 대해 "불완전하고 선별적이며 이기적인 편집으로 말러의 삶에 대한 왜곡된 인상을 제공한다"는 비판했다.


생존한 딸 안나는 성장해 유명한 조각가가 되었다. 국제 구스타프 말러 협회(International Gustav Mahler Society)는 1955년 빈에서 브루노 발터를 초대 회장으로 추대했고, 알마는 명예 회원으로 위촉되었다.


말러의 작품 공연은 그의 사후 점점 줄어들었지만, 네덜란드에서는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허바우(Amsterdam Concertgebouw)의 상임지휘자 빌렘 멩엘베르흐(Willem Mengelberg)의 옹호로 인해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1922~1928년까지 뉴욕 필하모닉과 말러를 정기적으로 미국 청중들에게 소개했다. 1916년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wsky)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교향곡 8번과 <대지의 노래>를 미국 초연했고, 뉴욕 공연도 성공시켰다. 영국에서는 버밍엄 시티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아드리안 불트(Adrian Boult)가 말러를 연주했고, 헨리 우드 경(Sir Henry Wood)은 1930년 런던에서 8번의 공연을 펼쳤다. 브루노 발터나 말러의 보조 지휘자였던 오토 클렘페러는 종종 말러를 연주했다.


혈통이 유태인이었다고 알려졌기 때문일까, 나치 시대에 말러의 음악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당했다. 대신 1941년 초 베를린과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기간 동안 암스테르담에서 유대인 오케스트라와 유대인 청중만을 대상으로 연주된 적이 있다.

 

오리지널 미국 태생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은 미국에서 50년 동안 방치된 말러의 부흥을 불러일으켰다. 음악학자 데릭 쿡(Deryck Cooke)은 전쟁 사이에 말러의 명성에 영향을 미쳤던 "반낭만주의에 대한 오래된 논쟁"에 물들지 않은 전후 새로운 음악 애호가 세대가 등장하면서 말러의 인기가 높아졌다고 진단했다. 해방된 시대에 말러에 대한 열정은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1960년 그의 탄생 100주년 이후 말러는 모든 작곡가 중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고 가장 많이 녹음된 작곡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한편 말러의 첫 제자로는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와 그의 제자인 알반 베르크(Alban Berg), 안톤 베베른(Anton Webern)이 있었으며 이들은 함께 오늘날 빈 시립음악원이 된 제2 빈 음악원을 설립했다. 말러의 음악은 이 3인조가 진보적인 조성주의에서 무조음악으로 이동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2016년 영국의 'BBC Music'이 151명의 지휘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말러의 교향곡 중 3개를 역대 상위 10개 교향곡에 포함시켰을 정도로 오늘날 그의 평가는 확실하다.


함부르크에 있는 큰 규모의 구스타프 말러 박물관 말고도 오스트리아 남부 티롤의 슐루더바흐에는 말러가 썼던 오두막에 작은 박물관과 기념관이 남아 있다. 말러가 사용한 아터제 호숫가와 뵈르터제 호숫가의 다른 오두막 두 채 역시 작은 박물관이 되어 있다. 특이하게 미국 서부 콜로라도주 록키산맥에는 작곡가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말러산(Mount Mahler)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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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독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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