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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의료 천국’이던 대한민국, ‘의료 지옥’ 안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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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싱크탱크 레가툼연구소에서는 2007년부터 매년 ‘세계번영지수’를 발표한다. 경제, 기업환경, 국가경영, 교육, 보건, 안보 등의 항목을 나눠 국가들의 순위를 매긴다. 대한민국은 보건의료 분야에서 3위를 기록했다. 1위인 싱가포르는 도시국가이니 일반 국가 중 대한민국은 일본에 이어 2위다. 이 결과에서 보듯 대한민국의 의료 수준이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 무척 앞서가고 있음은 확실해 보인다. 수많은 외국인 환자는 한국 의료를 두고 ‘천국’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왜 한국 의료는 환자에게 천국일까. 가장 큰 이유는 ‘저수가’다. 한국의 의료수가는 대략 일본의 30%, 미국의 20~10% 정도로 낮게 책정돼 있다. 의료수가는 보건복지부 산하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결정하는데 의사의 의견 반영이 어렵다. 위원 총 25명 가운데 의사가 2명뿐이라 협상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의료수가는 원가의 70~80% 정도에 불과하다. 오죽했으면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8월 31일 의료개혁특별위원회 개선안을 발표하며 “3000여 개 의료 행위를 ‘원가 수준으로 인상’하겠다”고 했을까.

 

이러니 의사들은 급여 진료를 박리다매하거나 비급여 진료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2.5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서 두 번째로 낮은 수치지만 각종 진료와 수술·시술에서 대기시간은 가장 짧다. 인구 1000명당 의사 수 5.5명 오스트리아에서는 고관절치환술 대기일이 570일이지만 우리나라는 0일이다. 열심히 일할 필요 없는 준공무원 신분인 의사와 ‘내 돈 들여 개원한 자영업자’ 의사의 차이가 극명히 드러난다.

 


 

일본보다 200배 높은 의사 기소 건수

 

진료가 빨리 이뤄지는 이유가 또 있다. 대한민국은 진료과를 전공하지 않은 ‘일반의’의 비율이 6%로 OECD에서 가장 낮은 나라다. 일을 실수 없이 빨리 처리하는 전문의의 비율이 그만큼 높고, 전문의가 되기까지 저임금 고강도 노동을 버틴 전공의가 많이 존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 CT, MRI 등 최종 진단을 하는 기기들이 OECD 4위에 오를 정도로 많고, 검사료도 싸기 때문에 빠른 진단이 가능하다. 병원 이용을 제한하지 않으니 국민 1인당 외래 진료 횟수가 연평균 14.7회로 OECD 평균 5.9회를 압도하는 1위다. 병원의 1000명당 병상수도 OECD 평균 4.3병상을 압도하는 12.7병상으로 1위다. 게다가 지역별 의사 분포가 가장 고른 나라이기도 하다.


이러니 OECD의 각종 건강 수준 평가는 상위권일 수밖에 없다. 기대수명 2위, 영아 사망률 10위, 암 사망률 5위, 순환기 사망률 1위, 치료 가능 사망률 2위다. 오죽했으면 세계 모든 나라가 코로나 팬데믹 시기 평균수명이 짧아졌지만 오직 한국만 평균수명이 늘어났을까.


그 나름대로 잘 굴러가던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이 붕괴한 것은 바로 법적 리스크 증가와 실손보험의 확대 때문이다. 의료 소송이 늘면서 법적 리스크가 커졌고, 의사들은 고위험 진료를 회피하기 시작했다. 2000~2005년까지 6년간 의료 분쟁으로 인한 민사소송은 57.8% 늘었다. 소송 남용을 막기 위해 2012년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설립됐지만 분쟁은 오히려 늘었다. 2012년 의료 분쟁은 총 385건. 해마다 증가해 2019년에는 2647건에 달했다.

 

형사소송도 늘었다. 2006년 의료인 피고인 수는 1명이었지만 2020년 61명까지 급증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봐도 국내 의료 분쟁의 형사 기소 경향은 지나치게 높다. 2011~2015년까지 5년간 업무상 과실치사상죄로 인한 의사 100명당 연간 기소 건수는 약 0.258건, 일본이 약 0.001건으로 한국이 일본의 약 264.9배에 달한다.

 

한국보다 의사 수가 두 배가량 많은 영국은 최근 6년 동안 의사가 업무상과실치사상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례가 4건에 불과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670건이나 됐다. 독일은 2013~2019년까지 의사에 대한 형사처벌은 단 6건. 그마저 벌금형이 대부분이었다. 미국은 의료행위 관련 중과실치상으로 인한 경우는 약물 과다 처방 및 사용 위반의 경우만 있다.

 

실손보험의 확대도 문제를 야기했다. 2009년 10월 정부가 실손보험을 표준화해 단독 상품으로 도입하자 실손보험 가입자 수는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했고, 2018년 말에는 4000만 명에 이른다. 진료비 본인 부담금이 거의 없게 되자 도수치료 같은 통증 진료와 백내장 수술, MRI 같은 비싼 검사, 무분별한 검진 등이 급격히 늘었고 국민 전체 의료비도 그만큼 증가했다. 이에 따라 대학병원에서 저수가에 고위험 진료를 하던 의료 인력이 비교적 안전한 비급여 진료 시장으로 빠져나가는 현상이 발생했다. 비급여를 급여화하는 문재인 케어의 도입은 건강보험 재정만 축내다 끝이 났다.

 

어떤 보고서도 2000명 늘리라는 말 없어

 

8월 20일 국회 보건복지위에서 열린 연금 구조개혁안과 의대 정원 확대에 관한 질의응답에 참석한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오른쪽)과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

 

의사들은 적절한 진료를 왜곡하는 이 정책들을 철회할 것을 주장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기득권 의사’라는 소리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의사의 소득만 늘어나고 필수 의료 인력이 줄어들자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이 이슈화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올해 2월 정부는 의사가 부족하다며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필수 의료진에 대한 처우 개선, 저수가, 법적 리스크, 실손보험 문제 등 근본적 해결책에 대한 정책 제시 및 의료진 설득은 못 한 채 기존 의대 정원 3058명을 5058명으로 60%나 갑작스레 늘린 것이다. 의사 수를 늘리면 누군가는 고위험 진료를 할 것이라는 이른바 ‘낙수효과’론에 전공의들은 사직서를 던졌고, 의대생들은 휴학계를 냈다.

 

싼값에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던 한 축인 저비용의 전공의가 사라지니 의료 체계의 붕괴가 시작됐다. 도제식 교육도 무너져 미래 후손들은 심장수술 같은 고위험 수술을 받을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하다.

 

의료대란은 점점 악화하는데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8월 29일 국민의힘 연찬회에서 “6개월만 기다리면 우리가 이긴다”며 의사를 적으로 보는 시선을 드러냈다. 이 장관은 9월 3일 국회 교육위원회에 출석 “6개월만 버티면 된다는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며 “이긴다는 것도 의사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개혁을 해나가는 힘든 과정을 넘어가자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변명이야 어찌 됐든 정부가 의료인과 감정적 대치만 하는 상황으로 가고 있고, 그렇게 천국이던 대한민국 의료는 ‘지옥’이 돼버렸다.

 

자존심 싸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 솔로몬의 재판에서 진정 아이를 살리려 했던 어머니의 마음으로 의정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 ‘누가 이기나 보자’가 아닌 ‘누구라도 먼저 나서야’가 돼야 한다는 말이다.

 


 

먼저 증원의 타당성을 살펴보자. 정부는 우리나라 의사 수가 OECD 최하위이고 미래에는 의료 인력이 더 부족하게 될 것임을 여러 보고서를 근거로 주장했다. 2030년 4094명, 2035년 9654명이 부족할 것이라 전망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 2030년 3817명, 2035년 1만650명이 부족할 것이라 전망한 KDI 보고서, 2030년 3979명, 2035년 1만816명이 부족할 것이라 전망한 서울의대 홍윤철 교수연구팀의 보고서가 그것이다.

 

이러한 보고서의 어느 부분에도 1년에 의사 2000명을 증원해야 한다는 내용이 없다. 더불어민주당 신현영 전 의원이 3월 7일 위 세 가지 보고서의 저자(홍윤철 교수, 신영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명예위원, 권정현 KDI 연구위원)을 초청해 ‘의사 수 추계 연구자 긴급 토론회’를 열었는데 이들 모두 2000명이라는 증원 규모에 부정적 시각을 드러냈다.

 

적절한 교육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속도 조절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패널로 참석한 오주환 서울의대 교수는 “고령인구가 많아진다고 해서 무조건 의료서비스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고 또 의사도 건강한 고령층이 늘어나 은퇴 시간이 미뤄져 이를 고려할 경우 2050년까지 의사가 부족하지 않다는 시뮬레이션도 나온다”고 주장했다.

 

 

급작스럽게 정원을 늘렸을 때 교육의 질 저하도 문제다. 정원이 4배 이상 증가한 여러 지방 의대의 경우 교수진 부족, 강의실 부족, 해부 실습에 필요한 카데바 등이 문제가 되고 있다. 정원을 무분별하게 늘리면 의학교육평가원의 인증 심사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 명백하다. 최악의 경우 정원을 늘려도 서남의대처럼 폐교될 수 있다.

 

의료인들은 의대 증원을 하되 저수가 구조, 실손보험 및 법률적 리스크 완화 등의 제도개혁과 함께 점진적으로 350~500명 정도씩 의대 증원을 하자고 주장을 해왔다. 무턱대고 직역 이기심으로 증원 반대만 해온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렇게 온건한 주장에 귀를 귀울였더라면 지금의 의료대란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 집단을 개혁할 때는 먼저 그 집단이 어떤 성과를 내왔는지 봐야 한다. 좋은 성과를 내왔으면 이미 형성된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고 점진적 개혁을 하는 것이 옳다. 나쁜 성과를 내고 집단 내부에 불법이 판을 친다면 급진적 개혁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전 세계에서 2등을 달리는 대한민국 의료는 어떤가. 당연히 점진적 개혁이 필요하다. 이제 OECD는 그만 논하고 점진적 개혁으로 1등으로 올라서야 한다.

 

의사들과 대화하려면 먼저 정부는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을 경질해야 한다. 2012년 박민수 당시 보험정책관이 주도했던 맹장, 탈장, 치질, 제왕절개 등의 진단명에 비급여 진료 및 추가 검사 등을 제한하는 ‘포괄수과제’가 시행되면서 다수의 산부인과, 외과의사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이에 몇몇 의료인은 박민수 차관에게 문자로 협박하며 고소·고발전이 이어졌었다. 그때부터 이어져 온 악연인지 최근의 언행을 보면 다분히 감정적 언행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의새’ ‘환자 사망 시 의사에게 법정최고형’ ‘전세기 동원해 환자 치료’ ‘카데바 수입 및 공유’ 등의 발언을 접한 대다수 의사들은 박민수 차관과는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정부에서는 경질을 통해 대화에 나서기 위한 성의를 보여야 한다.

 

다음으로 의료계가 오래전부터 주장해 온 급여 진료 수가 인상, 점진적 의료 인력 증원, 법적 리스크 완화를 이뤄내야 한다. 단, 교육 가능한 수준의 증원안이어야 한다. 기존 여러 의료인이 주장한 ‘350명 증원+전남권 의대신설’안을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50명은 2006년 당시 의약분업 및 저수가 고수 정책으로 의료 인력 과잉 우려로 줄인 정원이라 의료계에도 원점 유지로 해석할 수 있다. 증원 자체를 물릴 수 없는 정부에도 명분이 될 수 있다. 필자가 만난 전공의와 교수 그리고 봉직의와 개원의 대부분이 350명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또한 광역자치단체 중 의대가 없는 유일한 지역인 전라남도의 목포나 순천에 의대를 만들어 지역민들이 멀리 가지 않고도 진료받을 수 있는 의료 인프라를 만들어주는 것이 좋다. 다른 대안이라면 의료 일원화를 통해 한의사들을 교육 후 진료 현장에 투입하거나 군 장교 출신 의사 정원을 늘리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의료 인력 추계 기구를 설치해 정치권의 입맛에 따라, 선거 유불리에 따라 이용하는 것이 아닌, 과학적 데이터로 증원과 감원을 결정해야 한다.

 

다행인 것은 늦었지만 정부가 이제라도 원점 논의의 뜻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대통령실은 9월 6일 기존 2000명으로 발표한 2026학년도 의대 증원 규모에 대해 “합리적 안을 제시하면 언제든 제로베이스에서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의료 사태 해결을 위한 여·야·의·정 협의체를 구성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은 환영할 만한 소식이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다. 대통령실이 한발 물러선 만큼 협의에 물꼬가 트여 의료계 정상화, 그 이상의 성과를 낼지 관심이 모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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