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장군 페탱(Philippe Pétain)은 영웅과 반역자란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1차 세계대전에선 구원자로 추앙받았지만, 2차 세계대전에선 나치에 굴복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처럼 누군가를 평가하고 낙인찍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엇이 지워지고 삭제되는지는 냉정하게 살펴봐야 한다. 페탱이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배경엔 프랑스가 위기에 몰렸을 때마다 책임을 회피한 기득권자들의 행태가 숨어 있다.
1916년 11월 베르됭 전투가 끝나갈 무렵 프랑스의 니벨 장군은 새로운 공세를 계획했다. 니벨은 보병의 전진 속도에 맞춰 포병의 탄막을 이동시키는 전술을 활용해 엔강 유역의 독일군을 일거에 몰아내고자 했다. ‘극적인 승리’를 표방한 니벨의 계획은 프랑스 병사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고, 베르됭 전투의 승리로 낙관적인 분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반대하던 정치가들도 니벨의 공세에 기대를 걸기 시작했다. 하지만 1917년 4월에 전개한 프랑스군의 공세는 실패했다. 단 하루 만에 1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프랑스군은 동요했다. 최전방의 병사들은 참호로 복귀하는 것을 거부했고, 명령체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항명한 병사들을 처형하고 유배를 보내도 항명과 폭동은 가라앉지 않았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영광의 길(1957년)’은 ‘니벨 공세’와 프랑스 병사들의 집단항명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 시기에 ‘베르됭의 구원자’ 필리프 페탱(1856~1951년) 장군이 사태 수습에 나섰다. 페탱의 전략은 단순하지만 놀랍도록 효과적이었다. 그는 항명한 병사들의 사형을 최소화했고, 휴가제도와 병사들의 보급 문제를 개선했다. 페탱은 최전방 병사들이 겪는 불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전방 부대를 직접 방문해 병사들을 설득하면서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전략을 고수했다. 페탱의 노력으로 프랑스군은 1917년의 붕괴 위기를 넘겼다. 이것은 베르됭을 구원한 것보다 훨씬 탁월한 업적이었다.
1918년 봄, 독일군은 미군이 도착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고자 최후의 공세에 나섰다. 그러나 페탱의 지휘 아래 전열을 수습한 프랑스군은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 독일군의 공세를 견뎌냈다. 그러나 1918년 가을, 연합군이 최후의 반격에 나설 때 공세를 지휘한 것은 페탱의 후임 포슈 원수였다. 페탱은 연합군 전체 총사령관을 맡는 방식으로 좌천됐다.
프랑스군 지휘부에는 페탱을 질시하는 자들이 많았다. 페탱은 가장 위험한 순간에 일종의 ‘소방수’로 투입됐다가 밀려났다. 베르됭 전투 때와 비슷한 결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기억은 전쟁에 참전한 프랑스 청년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고, 그들이 장년에 이를 때까지 영향을 미쳤다. 젊은 시절 끔찍한 참호전을 겪은 프랑스의 40~50대는 히틀러가 체코와 오스트리아를 병합할 때 독일과의 충돌을 꺼렸다.
1939년 폴란드가 침공당했을 때도 프랑스 군대는 국경 지역에 구축한 마지노 요새에 웅크린 채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만약 프랑스군이 독일로 진격했더라면 전쟁은 국지전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프랑스의 기성세대는 전면전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그토록 무기력했던 프랑스는 패전이 임박하자 다시 페탱을 소환했다. 페탱은 패전이 다가온 1940년 5월 프랑스 총리에 임명됐다. 당시 고위 지휘관들과 정치인들은 패전에 책임지지 않았다. 그들은 80대 고령에 접어든 페탱을 앞세워 항복 문서에 서명하도록 했다.
페탱은 독일에 협력을 선언하고 나치의 괴뢰정부인 ‘비시 정부(Vichy France)’를 구성해 국가원수가 됐다. 페탱은 프랑스 청년들의 희생을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한때 그의 부관이던 드골 장군은 페탱을 따르지 않고 영국으로 망명해 항쟁을 지속했다.
비시 정부는 독일이 노동력을 요구하자 프랑스인들이 동원되도록 허용했고, 레지스탕스와 유대인들을 독일에 넘겼다. 비시 정부가 적발한 프랑스 내 유대인 7만여명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그들 중 생존자는 3%에 불과했다. 레지스탕스 조직도 비시정부의 탄압에 궁지에 몰렸다. 페탱은 프랑스의 구원자에서 순식간에 배신자로 전락했다.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에서는 대대적인 ‘콜라보라시옹(Collaboration·나치 부역자)’ 처벌 작업이 벌어졌다. 페탱도 반역죄로 법정에 섰다. 법정에서 검사들은 비시 정부의 반역행위를 낱낱이 파헤치면서 사형을 구형했다.
그러나 페탱을 옹호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옹호론자들은 비록 나치에 협력했지만 페탱이 독일에 끌려간 프랑스군 포로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노력한 사실을 강조했다. 또한 페탱이 나치에 군사적인 협력을 거부해 프랑스의 해외식민지가 유지됐고 그 덕분에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자유프랑스군이 전력을 키울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육군 원수 제복을 입고 법정에 선 페탱은 “나는 언제나 조국이 부르면 응했다. 프랑스는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순간마다 나에게 의지했다”고 스스로 변호했다.
재판부는 곤란한 입장에 처했다. 페탱에게 무죄를 선고하면 나치를 청산하는 작업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었다. 반대로 법대로 처벌하면 옹호론자들의 반발과 함께 전쟁 초기 패전의 책임을 외면한다는 비판을 받을 상황이었다. 재판부는 고심 끝에 사형 판결을 내렸지만 90세가 넘은 나이와 베르됭 구원의 공적을 참작해 얼마 후 종신형으로 감형해줬다. 페탱은 일드외 섬에 수용됐다가 1951년 7월 23일 사망했다.
영웅과 반역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는 페탱은 지금도 프랑스에서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1970년대 퐁피두 대통령 시절 베르됭 전몰자 기념관에 그의 유해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우파들이 페탱의 유해가 든 관을 절도하는 일이 발생했다. 2018년에는 마크롱 대통령이 페탱을 “위대한 군인”이라고 평가하자 드골을 신봉하는 자들과 유대인 단체가 비판 성명을 내기도 했다.
과연 페탱은 영웅인가 반역자인가. 이 논쟁 과정에서 지워진 것은 프랑스가 위기에 몰렸을 때마다 책임을 회피한 기득권자들의 행태다. 베르됭 전투와 니벨 공세에서 페탱은 위기를 수습했지만, 곧바로 뒷전으로 밀려났다.
또 제2차 세계대전 초반 어이없게 나치에 패했던 프랑스군 지휘부의 무능은 페탱을 처벌하고, 레지스탕스 활동을 신화로 만드는 과정에서 은폐됐다. 특정인을 평가하고 낙인찍기는 쉽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삶과 고뇌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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