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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실패(失敗)와 불행(不幸)의 역설(逆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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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paradox)에 대한 문학용어사전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모순(矛盾)되고 부조리(不條理)하지만, 표면적 진술을 떠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근거가 확실하든지, ‘깊은 진실을 담고 있는 표현’을 의미한다. 역설은 한 문장 안에서 상반(相反)된 두 가지의 말이 공존(共存)한다. ‘찬란한 슬픔’에서 슬픔은 ‘우울하고 음침(陰沈)’한 의미를 지니는데, 이것을 ‘찬란하다’고 표현한 것은 ‘모순’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을 새겨보면, 슬프기는 하지만 절망적인 슬픔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아름다운 슬픔’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처럼 역설은 일반적으로 반대개념을 가진, 혹은 적어도 한 문맥(文脈) 안에서 함께 사용될 수 없는 말들을 결합시키는 ‘모순 어법’을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을 쉽게 정의 내리기는 그렇게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이는 사람마다 판단하는 기준이 천차만별(千差萬別:모두 차이가 있고 구별이 있음)이기 때문이며, 한 발 더 나아가 각각 두 가지의 역설 때문일 것이다. 첫 번째 역설은 실패 덕분에 성공하는 경우, 불행했기 때문에 행복한 경우, 두 번째는 성공 때문에 나중에 실패한 경우, 행복했지만 나중에는 불행한 경우이다. 사실 사람이란 실패를 딛고 성공하거나 불행을 딛고 행복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성공 이후 실패의 쓴 맛, 행복 이후 불행의 쓴 맛은 견디기 힘든 것이 세상 이치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실패나 불행의 고통과 고난, 역경과 시련을 승화(昇華)시켜, 역설에 이르는 데에 이 글의 초점을 맞추어 나아가기로 한다.

실패는 우리네 삶의 일부이며, 어느 누구든 한 때 실패를 경험하게 되는 것을 피할 자(者)는 없다. 그럴 때일수록 현명하고 지혜롭게 대처하면 더 큰 성장과 배움의 기회로 삼을 수 있으므로, 건전한 마음과 정신이 되는 사자성어와 명사들의 명언을 상기(想起)해보는 것은 유의미(有意味)한 일일 것 같다. 망우보뢰(亡牛補牢)는 우리 속담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로 ‘과거의 실수나 실패를 교훈 삼아 미래를 준비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가르침이고, 병가상사(兵家常事)는 전쟁이나 인생행로에서 승리와 패배는 일상의 일로 실패한 자를 위로하는 말로 ‘어려움을 극복하길 바라는 마음’의 의미이며, 권토중래(捲土重來)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돌아온다는 의미로, 한 번의 싸움에 패하였다가 다시 힘을 길러 온다는 말로, 어떤 일에 ‘실패한 뒤에 다시 힘을 길러 그 일을 재(再) 착수하는 것’을 비유할 때 쓰이는 말이다. 실패와 관련된 긍정적인 시각(視覺)을 가질 수 있는 명언들로, 가장 흔하게 들어온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다.’는 미국의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의 말이고, ‘성공은 실패를 극복하는 능력에서 나온다.’는 영국의 지휘자 콜린 R. 데이비스의 말이며, ‘오늘 실패한 것은 내일 성공할 수 있는 기회이다.’는 미국의 철강 왕 앤드류 카네기의 말이다. 또한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고속도로이다.’ 영국의 천재 요절(夭折:젊은 나이에 죽음) 시인 존 키츠의 말이고, ‘실패는 사람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 더 현명하게 말이다.’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의 말이며, ‘실패는 우리의 가르침이다.’ 아일랜드 시인,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다. 무엇보다도 실패는 성공의 초석(礎石)이고, 새로운 출발점이며, 경험과 용기를 주게 되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의지와 기회’를 만들어 주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 페니실린, 합성고무, 포스트잇, 나일론, 안전유리, 전자레이지, 과속 탐지기 등 수많은 것들이 실패작에서 새로운 용도를 찾은 발명품으로 유명한 것들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신(神)의 약으로 발기부전의 혁명, 신기원(新紀元:획기적인 사실로 말미암아 전개되는 새로운 시대)을 이룩한 ‘비아그라’는 본래 심장질환인 협심증 치료를 목적으로 개발된 약이었으나 임상실험과정에서 본래의 목적의 치료의 효과는 그저 그러해서 하마터면 사장(死藏:활용하지 않고 쓸모없이 묵혀 둠)될 뻔했던 약이다. 그런데 약물을 처방받은 환자가 발기가 일어나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발견되어 발기부전 치료 용도로, 세계적으로 널리 애용(愛用)되어지고 있으며, 일부 미숙아나 선천적 동맥이나 혈류에 문제가 있는 소아 폐동맥 고혈압, 고산병 치료 처방약으로도 쓰이고 있는데, 이 약을 연구 개발한 미국의 글로벌 바이오 제약회사 화이자는 본래의 목적은 실패했어도 새로운 효능을 지닌 약 개발로 미국 내 최고의 회사 이익과 성장 그리고 의료계의 세계적 명성, 더불어 ‘비아그라’ 제품명은 발기부전 치료약의 대명사로 불리게 된 실패의 역설에 대한 근래(近來)의 대표적 사례이다. 실패는 결코 헛된 것, 시간 낭비, 정력낭비가 아니다. ‘실패에서도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내는 정신이야말로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실패의 역설이라는 성공신화를 낳은 세계적 인물들로, 알버트 아인슈타인(4세까지 말을 못 했고, 7세가 되어서야 글을 읽게 되었으며, 대학입시에도 실패했지만 세계적 물리학자가 되었다.), 토머스 에디슨(전구를 만들고자 천 번 이상을 시도했지만 실패할 때마다 작동하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어 마침내 성공하게 되었다.), 오프라 윈프리(방송리포터로 일할 때 TV뉴에 적합하지 않다고 해고당했지만, 끈기를 갖고 다시 일어서 미국 방송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인정받았다.), 조엔 케이 롤링[언론계에서 실패했고 ‘해리포터’를 발표하기 전 까지는 빈곤했지만, ‘해리포터 시리즈’를 내고 세계적 명성과 부(富)를 얻게 되었다.], 윈스턴 처칠[초등 6학년 때 중퇴하고 공직에서도 실패했지만 62세에 명망(名望:명성과 인망) 있는 영국 총리가 되었다.] 등이 있다.

실수나 실패, 사람이라면 누구나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은 단어이다. 그래서 실수나 실패가 두려워서 실행을 제대로 해보지 못한 것들도 여럿 있기도 하다. 그런데 어린 시절 읽었던 위인전을 통해서 정치계, 경제계, 사회적, 역사적 위대한 인물들의 공통점은 바로 실수,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끈기와 노력으로 결실을 이룩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좌절과 포기를 하지 않았다는 점들이 우리에게 더욱 감동(感動:깊이 느껴 마음이 움직임)과 감명(感銘:감격하여 마음에 깊이 새김)을 주게 되는 것이다. 보통 범인들은 실수, 실패의 쓴 맛보다는 익숙한 맛이고 달콤한 맛인 안정적인 것을 찾으려 하고, 그리고 실제로 찾는다. 그런데 인간에게 왼쪽 발과 오른쪽 발이 있는 것은 ‘실수나 실패를 번갈아 가면서 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두려움이라는 창살에 갇혀 꼼짝도 못 하고 있는 사람은 더 이상 발전이나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안정적인 안주(安住)가 장시간 지속되다 보면 게으름, 나태라는 녀석이 찾아와 물귀신처럼 퇴보(退步:수준이나 정도가 전보다 뒤 떨어짐)로 끌고 들어간다. 지난날들을 돌이켜 볼 때, 한 일 보다도 하지 않은 일들에 더 많이 후회가 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정박(碇泊)해 있는 배의 닻을 올려 항해에 나서라. 푸른 바다, 망망대해(茫茫大海:한 없이 크고 넓은 바다)로 나가라. 작열(灼熱:이글이글 타오름)하는 태양, 폭풍우, 때로는 해적 떼와도 맞서 싸워야 한다. 그래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같은 이치로,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불행을 정의할 때 사람마다 각기 다 다를 수 있다. 어떤 이는 자신이 바라는 대로 안 되면 불행하다 할 수 있고, 어떤 이는 자신의 가치관이나 인생관, 신념이 위협받을 때 불행하다 할 수도 있지만, 대체로 자신의 기대나 희망이 현실과 다를 때 생기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그렇다면 불행의 원인은 어디에서 오는가? 외부적 상황이나 환경인가, 아니면 내부적인 태도나 인식에 있는가? 명사들의 명언들을 빌리자면, ‘불행의 원인은 늘 나 자신에게 있다.’ 프랑스 수학자, 철학자 파스칼의 말이고, ‘불행을 통해 행복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영국의 성직자, 역사가 토마스 풀러의 말이며, ‘불행은 대개 고민이나 번뇌를 할 시간적 여유를 주기 때문에 생겨난다.’와 ‘불행에 빠져야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는다.’는 오스트리아 소설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말이다. 또한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가장 풍부한 재산으로 여기지 않는 자는 누구나, 비록 이 세상의 주인이라도 불행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말이고, ‘너는 자꾸 멀리만 가려느냐. 보라 좋은 것은 가까이 있다. 다만 네가 잡을 줄만 알면 행복은 언제나 거기 있다.’ 독일의 작가, 철학자 괴테의 말이며, ‘행복과 불행이란 그것이 얼마나 심한가에 따라서가 아니라, 얼마나 심하게 느끼는가에 따라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프랑스의 고전주의 작가 라로슈푸코의 말이다. 결국 불행이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며, ‘태도와 인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불행이란 스스로 만들기 때문에, 스스로 극복해야만 한다. 불행을 벗어나는 지름길은 바로 ‘나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의 장·단점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하며, 그러고 나서 자신의 목표를 설정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해 나아가야 하겠다. 설사 지금 불행하다 해도, 그 불행을 역설로 바꾸는 것도 바로 나다. ‘마음의 짐을 풀고 허물과 걱정을 떨쳐내고 폭풍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등불이 되어 자신을 의지하며 진정한 나 자신을 찾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 행·불행도 ‘습관’이다. ‘어떻게 지니냐’에 따라 다르다. 그러므로 불행한 마음에서 벗어나 행복한 마음을 습관적으로 몸에 지녀야 한다. 우리네 삶에는 빛과 어둠이 있다. “불행에도 ‘빛’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한 사람에게서 노년, 말년이 편안하고 행복해야 성공한 삶’이라는 것이 정설(定說:확정되거나 인정된 설)이긴 하다. 그런데 노년에 배우자와 사별, 이혼, 불화로 말미암아 별거나 졸 혼으로 혼자되어 문자 그대로 독거노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실패하고 불행한 삶’이라고 보통은 여긴다. 미국의 사회학자 모리 슈워츠의 말처럼 ‘실패와 불행은 또 다른 기회’인 것이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사랑하는 자식내외들, 금쪽같은 손주(손자와 손녀를 아우르는 말)들이 있지 않은가? 홀로 살아가고 있으면 자식들, 손주들, 친족들, 친구들, 그 밖의 주변사람들이 애처롭고, 측은하게 생각하고, 또 어쩌다 만나면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런데 그네들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긴 하지만, 실상 나 자신은 때론 외롭고 서글픈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나 혼자만의 즐거움, 편안함, 행복감이 훨씬 더 크다. 그래서 얼마든지 견딜만하다. 주변사람들의 생각이나 시선만큼 그렇게 측은(惻隱) 하지는 않다. 이렇게 혼자만의 조용하고 한가한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있었겠는가? 난 생 처음 맞이하는 나만의 기나긴 휴식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더불어 젊어서 생활전선에서 바쁘게 일하느라 못했던 일도 하고, 보고 싶은 사람도 언제든지 만날 수 있고, 제때에 끼니도 챙겨 먹고, 낮잠도 잘 수 있고, 나만의 즐거운 일, 또는 찾아 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내 마지막 인생을 조용히 정리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데 크나큰 만족을 한다. 이거야 말로 노년의 실패나 불행의 역설(逆說)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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