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대만은 유사한 지정학적 상황에 놓여 있다. 특이한 점은 영화산업의 부침 역시 비슷한 길을 걸었다는 사실이다. 대만은 1980년대 들어서면서 젊은 감독들과 몇몇 제작자의 대오각성으로 인해 신랑차오(新浪潮)라고 하는 뉴웨이브를 일으켰다. 세계 영화사에 당당히 등재된 대만의 새로운 영화 조류는 에드워드 양의 ‘해탄적일천’이라는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그 존재를 알렸다. ‘그날, 해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제작자가 영화 제작에 ‘간섭’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권리 행사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감독 처지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통제되는 상황이 여간 못마땅할 것이다. 감독의 투쟁 대상은 제작자뿐만 아니라 때로는 제도, 검열 그리고 국가를 포함하기도 한다. 1970년대 한국 영화의 암흑기는 유신 체제의 검열제도가 원인의 한 축이었다. 1980년대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에로티시즘 영화는 정치적 소재에 민감했던 신군부의 3S(Sports, Screen, Sex) 정책으로 등장했다. 1970년대 실험영화 운동이나 영상시대 동인들의 활동, 1980년대 일련의 리얼리즘 영화는 제도와 정책에 저항하면서 태어났다.
영화는 언제 새로움을 갈망하는가
예술가를 자처하는 감독들은 통제와 간섭에 맞서야 하지만 흥행이라는 의무를 저버려서도 안 된다. 제작자들의 요구에 매몰되는 순간 자신을 감싸고 있던 예술가의 오라(aura)는 사라질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영화는 할리우드가 중심이었다. 스튜디오와 스타 시스템으로 무장한 할리우드가 완전한 진용을 갖추기 전에 유럽 영화가 위세를 떨친 적이 있다. 그러나 할리우드는 지난 1세기 동안 효율적인 영화 문법을 구축하면서 전 세계 영화 관객을 길들여왔다. 권토중래를 노리는 각국의 영화 예술가들은 검열기구(국가), 제작자에 더해 할리우드라는 거대한 산을 넘어야 했다.
영화사(史)에 존재한 모든 ‘새로운 물결’은 정체성 회복을 위한 몸부림이거나 과거에 대한 반성으로 집약된다. 영화사에 등재된 수많은 운동(movement)이나 경향(tendency)은 이를 대변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흥한 갖가지 ‘새로운 영화’의 모태인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은 할리우드와 전전(戰前)의 멜로드라마 양식에 대한 반발이다. 프랑스 누벨바그는 문학에 경도된 영화에 반기를 들면서 시작됐다. 1960년대 일본의 쇼치쿠 누벨바그 역시 전 시대의 양식에 도전하면서 변혁의 기치를 올렸다. 오버하우젠 선언으로 시작된 독일의 뉴저먼 시네마는 ‘미국화’한 ‘아버지 영화’의 죽음을 선언하고 그 전 세대(표현주의)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다. 그런가 하면 브라질에서 태동한 시네마 노보는 할리우드 스타일과 서구식 자본주의에 대항한 제3세계의 대표적 영화 운동이었다.
대만은 전 세계에서 한국과 지정학적 상황이 가장 유사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이 1970년대까지 반공영화를 내세워 국가 시책을 홍보했듯, 대만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1960년대 무협영화, 1970년대 코미디와 멜로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대만 영화산업은 관객의 취향과 공모해 끝없는 자기복제를 멈추지 않았다. 197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자 관객들이 기시감을 주는 영화에 등을 돌리면서 자국 영화를 잊어갔다.
틀에 박힌 줄거리를 양산하는 특정 장르에서 벗어나려면, 새로운 인재가 필요했다. 1982년 닻을 올린 신랑차오(新浪潮), 즉 대만의 뉴웨이브는 겹겹이 쌓인 위기를 탈출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됐다. 위기를 깊이 인식하고 있던 중앙영화사(CMPC)는 타오더첸(陶德辰), 에드워드 양(楊德昌), 커이정(柯一正), 장이(张毅) 등 신세대 감독 4인을 초빙해 옴니버스 영화 ‘광음적고사(光陰的故事)’를 세상에 내놨다.
1940년대 중반 등장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타도 대상은 그 전 시대에 유행했던 ‘백색전화 영화(Telefoni Bianchi films)’였다. 여기에는 상류층이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듯이 ‘하얀색’의 ‘전화기’를 붙들고 대화하는 장면이 예외 없이 등장했으며, 호화로운 아르데코 스타일의 세트 아래 보수적 가치와 권위를 존중하는 주제를 다뤘다.
대만의 1970년대 영화적 상황도 이와 유사하다. 코미디 장르와 더불어 일명 삼청영화(三廳電影)라고 불리던 경요(瓊瑤) 문학에 바탕을 둔 연애담이 주로 양산됐다. 삼청이란 거실, 식당, 카페를 일컫는데 여기서 이뤄지는 남녀의 대화가 이 장르의 주요 소재였다. 신랑차오를 주도한 젊은 예술가들은 삼청영화에 대한 거부감이 극심했다. 그들의 카메라는 허울뿐인 낭만주의의 외피를 뚫고 삶 속으로 전진하고자 했다.
아픔 공유한 두 여인의 해후
에드워드 양의 ‘해탄적일천’(海灘的一天·1983)은 바닷가에서 사람들이 뭔가를 발견하고 경찰에게 인계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윽고 신(scene)이 바뀌면서 라디오에서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이 들린다. 진행자는 이 곡을 연주한 웨이칭(후인멍)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주인공 자리(장애가)는 웨이칭의 목소리를 듣고 신문사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부탁해 그녀의 연락처를 알아낸다. 웨이칭은 13년 만에 귀국해 독주회를 열 계획이라 연습에 매진하다가 비서가 전해주는 자리의 메모를 받는다.
두 사람은 시누이와 올케가 될 뻔한 사이였다. 대학 시절 웨이칭은 자리의 오빠, 아센(가오밍홍)과 열애 중이었다. 하지만 아센은 아버지에게 정략결혼을 강요받는다. 아센은 결국 웨이칭과 이별하고 아버지 친구의 딸과 결혼한다. 이후 그는 아버지와 같이 병원을 운영하면서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살아간다. 웨이칭은 큰 충격을 받고 오스트리아로 도피하다시피 유학을 선택하지만, 피아니스트로 성공해 오늘에 이른다. 남매의 아버지는 이젠 딸, 자리마저 자신의 의지대로 결혼시키려 한다. 그 무렵 자리는 더웨이(마오 쉐웨이)란 대학생과 열애 중이다. 무기력한 오빠를 보면서 그녀는 가출을 결행한다. 자리와 더웨이는 가진 것 없는 상태에서 오직 사랑만으로 어렵사리 신혼생활을 시작한다.
더웨이에겐 아차이라는 친구가 있다. 유흥 좋아하고 여자 밝히는 낙천적인 그는 대기업 상속녀와 결혼해 승승장구한다. 더웨이는 아차이가 벌인 사업에 참여하면서 빠르게 상류층으로 편입한다. 자리는 꽃꽂이 학원에서 소일하고 집안 살림은 가정부가 도맡는다. 이들은 겉으로는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지만, 부부 사이에는 시나브로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 때문에 거의 매일 술에 취해 퇴근하는 더웨이를 보면서 자리는 과거를 그리워한다.
부부는 다투는 날이 늘어간다.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달라는 아내, 자신이 온몸을 바쳐 일한 결과로 물질적 풍요를 누린다는 사실을 아내가 깨닫길 바라는 남편. 두 사람 사이는 좀체 좁혀지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자리는 더웨이를 의심해 미행하지만, 그 사실을 회사 동료들에게 들키면서 남편이 친구들에게 망신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출장을 간 더웨이가 회사 여직원과 자리에게 보낼 편지의 수취인을 잘못 적어 보내면서 그들은 걷잡을 수 없는 위기를 맞이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어느 해변에서 사망했다는 전화가 걸려 온다.
그날 해변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영화 제목으로 쓰인 ‘海灘的一天(해탄적일천)’은 ‘해변에서의 하루’라는 뜻이다. 영문 제목인 ‘That Day, on the Beach’는 원제에 좀 더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더웨이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고 그가 남긴 약병만이 해변을 뒹군다. 경찰은 약병에 인쇄된 병원으로 연락해 더웨이의 신원을 확보한 후 자리에게 연락을 취한다. 급하게 달려간 자리는 혼란스럽다. “마지막으로 남편을 본 게 언제죠?” “남편이 밖에서 힘든 일이 있었나요?”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자료가 있나요?” 경찰은 그녀에게 사건 해결을 위해 질문을 던지지만, 그녀는 단 한마디도 할 수 없다. 그녀는 더웨이가 항우울제를 복용한 사실도, 그가 사라진 이유도 알 수 없다. 자리에게 많은 것을 물었지만 그녀가 아는 것이 없다고 하자, 경찰은 마을 주민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무슨 아내가 저래요? 남편이 맞긴 하답니까.”
더웨이의 사고 소식을 듣고 친구 아차이가 해변으로 찾아온다. 그는 더웨이가 공금 5000만 위안을 유용했고 이 돈을 가지고 일본으로 갈 계획이었으며 비밀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던 회사 동료 샤오후이(옌펑자오)와 이 해변에 들른 적이 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자리에게 전해준다. 그러면서 약병은 아마도 그때 버린 것일 수도 있으며 지금은 가짜 여권을 만들어 남미 어딘가로 떠났을 수도 있다고 상황을 유추한다. 말을 마치고 돌아서던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면서 자리를 더욱 혼란에 빠뜨린다.
“가능성은 두 가지야. 저들이 지금 찾는 시신이 더웨이거나 아니면 애초에 그런 사고는 없었던 거지…. 내가 더웨이라면 돌아오지 않을 거야. 물론 내가 틀릴 수도 있지…. 넌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겠지? 어떤 경우든 그 결과는 사실 별반 차이가 없다고 말이야.”
잠수부들이 뭔가를 찾은 듯 바다에 뛰어든다. 그리고 해변에 앉아 있는 그녀를 향해 소리를 지른다. 자리는 그 순간 뒤돌아서서 해변을 떠나고 있다. 파도 소리에 묻혀 그들의 말이 그녀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부부는 한 지붕 아래 살면서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도 몰랐다. 자리는 오랜만에 만난 대학 친구에게 하소연하듯 말한다.
“학창 시절 그렇게 공부하고 시험도 수없이 치렀는데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거지? 결혼이란 해피엔딩,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을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거지?”
웨이칭은 자리의 기나긴 이야기를 듣고 난 후, 그날 해변에서 있었던 사건의 결말을 물어보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어 말문을 닫는다. 대신 웨이칭은 정작 묻고 싶었던 자리의 오빠, 아센의 근황을 묻는다. 자리는 돌아가신 아버지 병원을 이어받아 운영하던 오빠가 작년에 간암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감독은 그가 했던 유언을 플래시백 영상으로 들려준다. 둘은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작별한다. 석양 속으로 자리가 사라질 때까지 웨이칭은 그녀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리고 마지막 내레이션이 엔딩을 대신한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시체가 더웨이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건 이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소녀가 자라서 완벽한 여인이 됐다는 것이다. 저 여인의 성장은 오롯이 해변의 그 사건 이후 시작됐으리라.”
우리의 ‘신랑차오’는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해탄적일천’은 ‘간단’하면서도 ‘복잡’하다. 이 모순적 형용만큼 작품의 형식을 적절하게 말할 수 있는 표현도 드물다. 166분 동안 진행되는 이야기는 이들이 커피숍에서 나눈 대화가 전부다. 그들은 주고받는 대화로 지난 13년을 술회한다. 그러므로 외적 형식은 너무나 간단하다. 복잡한 것은 영화적 시점과 시간 배열이다. 자리가 주도적으로 과거사를 말할 때, 그 과거 속에서 대과거가 플래시백의 형태로 침투한다. 에드워드 양의 플래시백은 현재-과거-대과거를 수시로 넘나든다. 현재는 지금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호텔 커피숍이며, 과거는 3년 전 더웨이가 실종된 사건이다. 대과거는 그들의 대학과 유년 시절이다. 여기에는 특별한 규칙이 없다. 내레이션을 이끄는 자리는 현재에서 과거를 그리고, 그 과거 속에서 플래시백으로 다시 대과거를 끊임없이 소환한다. 에드워드 양이 이런 전략을 선택한 표면적 이유는 그럴 때라야 비로소 굴곡진 여인의 삶을, 나아가 당대 대만 사회를 관객이 오롯이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데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더 중요한 이유가 숨겨져 있다.
20대 초반 대만을 떠난 에드워드 양은 30대에 돌아왔다. 그가 목격한 1980년대 대만의 내면 풍경은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산업 발달로 생활수준은 나아졌지만, 여전히 반공과 가부장 이데올로기에 갇힌 사회는 과거와 작별하지 못했다. 신랑차오의 또 다른 축이던 허우샤오센(侯孝賢)이 청년에게 주목했다면, 에드워드 양은 여성에게 집중했다. 그가 맡은 ‘광음적고사’의 2번째 에피소드인 ‘희망(指望)’은 이제 막 초경을 경험한 소녀가 느끼는 육체에 대한 매혹과 공포를 뒤섞어, 성인 세계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겪는 성장통을 보여줬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신랑차오의 개막을 알리고 싶었으리라. 그리고 ‘해탄적일천’에서는 추리극 형식을 내세워 정신적 성장을 거듭하는 여성을 그린다. 3년 후 선보인 ‘공포분자’(恐怖份子·1986)에서 여성은 성장을 넘어 기존의 통념을 뒤집고 사회 질서를 교란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해탄적일천’에서 자리의 성장을 방해하는 인물은 아버지와 남편 더웨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올곧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가족들에게 명령으로 일관하며, 자신은 간호사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 남편 더웨이는 자신이 밖에서 열심히 일할 때, 너는 집에서 꽃꽂이 말고 한 것이 무엇이냐고 아내에게 타박한다. 에드워드 양은 여성의 성장에 방해가 되거나 방관하던 남자들을 영화 속에서 모조리 축출한다. 독재자 아버지는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사망하고 아버지를 거역하지 못한 오빠는 간암으로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다. 마지막 걸림돌이던 남편의 생사는 오리무중이다. 1980년대 대만은 여전히 ‘새로운 물결’이 필요한 사회였기에 걸림돌은 여전히 유령처럼 출몰할 것이다. 그래서 감독은 그를 어느 때라도 재소환하기 위해 행방불명으로 처리한 것이다.
현재-과거-대과거를 아무런 제재 없이 오가는 자유로운 플래시백은 에드워드 양 자신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1960년대 모더니즘의 방법론을 도입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별스러운 영화적 장치를 통해 1960~80년대를 관통하는 시대착오적 관습이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2007년 60세로 사망할 때까지 그가 만든 작품은 총 7편에 불과하다. 에드워드 양이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갈 웨이칭 대신, 대만 사회에서 고군분투하려는 자리를 자신의 페르소나로 설정한 것은 영화뿐 아니라, 대만의 새로운 물결을 향한 의지의 표명으로 읽힌다. 신랑차오는 성장통을 겪는 동시대 젊은이를 앞세운 허우샤오셴과 에드워드 양이 거둔 눈부신 전과로 이렇듯 영화사에 당당히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들의 시작은 미약(微弱)했으나 그들의 나중은 심히 창대(昌大)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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