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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여행]

아름다운 호숫가 작은 마을, 모차르트 어머니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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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은 음악가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다 보면 어디에서나 모차르트를 만날 수 있다. 그의 삶과 음악을 따라 오스트리아를 한 바퀴 돌아본다.

 

오스트리아 장크트길겐에 있는 모차르트하우스 전경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 여행의 출발지는 그가 태어난 잘츠부르크에서 서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인 장크트길겐이다. 이곳은 모차르트의 어머니 안나 마리아 발부르가 페트를이 태어난 마을이다. 또 ‘난네를’로 불렸던 그의 누나 마리아 안나 발부르가 이그나티아 모차르트가 결혼해서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장크트길겐은 볼프강 제(볼프강 호수) 주변에 있는 세 마을 중에서 가장 큰 곳이다. 크다고 해야 인구가 채 4000명도 되지 않는 작은 동네라서 볼거리가 많은 곳이 아니고 할슈타트 제(할수타트 호수)에 붙은 할슈타트처럼 그림 같은 풍경을 자랑하는 곳도 아니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어머니가 태어났고 그의 누나가 결혼생활을 했던 곳이니 만큼 들러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실제 모차르트 가족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여기를 들르는 사람은 적지 않다.

 

오스트리아 장크트길겐 볼프강 제의 선착장 전경

 

장크트길겐이라는 지명은 7세기 그리스 출신의 성인인 성 애기디우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성 애기디우스는 독일어권에서는 길그, 또는 길겐으로 불린다. 마을의 원래 이름은 ‘윗동네’라는 뜻인 오베르드룸이었다. 볼프강 호수의 윗부분에 자리를 잡았다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었다.

 

장크트길겐에서 가장 먼저 가야 할 곳은 모차르트 가족의 내력이 담긴 ‘모차르트하우스’다. 이슐러 슈트라세(이슐러 거리)를 따라 걸으면 공용주차장에서 2~3분 거리다.

 

모차르트하우스는 볼프강 호수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있다. 볼프강 호수의 옛날 이름은 아베르제였다. 볼프강이라는 지명은 모차르트의 이름이 ‘볼프강 아마데우스’라고 해서 붙여진 것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이전인 10세기 성직자였던 성 볼프강이 장크트 볼프강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오스트리아 장크트길겐 볼프강 제 전경

 

이슐러 슈트라세는 한산하고 조용하다. 거리 끝에 옅은 미색 2층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초대형 저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작은 건물도 아니다. 이곳이 바로 모차르트의 어머니 안나 마리아와 누나 난네를이 살았던 모차르트하우스다.

 

장크트길겐은 원래 안나 마리아의 아버지, 즉 모차르트의 외할아버지인 볼프강 니콜라우스 페트를의 고향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고향을 떠나 잘츠부르크에서 법을 공부해 빈과 잘츠부르크에서 대학교수, 법원 직원으로 일했다.

 

니콜라우스 페트를은 병에 걸리는 바람에 고생하다 공기가 좋은 곳에서 치료하려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휘텐슈타인 성에서 성 관리인 일을 하면서 살았지만 나중에 이슐러 슈트라세 거리의 지방법원에서 직원으로 일하면서 청사의 한쪽 구석에 방을 얻어 아내와 함께 살았다.

 

그는 건강이 조금 나아지자 아이도 둘이나 낳았다. 귀향한 지 5년 만에 첫딸 마리아 로시나를, 이듬해에는 나중에 모차르트의 어머니가 되는 막내딸 안나 마리아 발부르가를 얻었다. 안나 마리아는 성탄절을 앞둔 1720년 12월 15일 출생했고 인근에 있는 장크트길겐(성 애기디우스)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오스트리아 장크트길겐 모차르트하우스 전경

 

니콜라우스 페트를은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병을 치료하느라 이곳저곳에서 돈을 많이 빌리는 바람에 유산은커녕 적지 않은 빚만 남겼다. 어머니는 재산이라고는 한 푼도 없이 두 딸만 떠안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자선연금이라도 받으려고 잘츠부르크로 돌아갔다.

 

안나 마리아가 어떻게 자랐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건강이 나빴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언니는 병에 걸려 잘츠부르크에서 일찌감치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가난 때문에 고생한 탓일 가능성이 높다. 안나 마리아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학교에 다니는 대신 어머니와 함께 하루 종일 수를 놓아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했다.

 

안나 마리아는 매우 활발하면서 신앙심이 두터웠고 총명했다. 1755년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끝까지 보살필 정도로 책임감도 강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처럼 고집이 세고 독선적인 남자와 결혼해서 끝까지 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성격 덕분이었다.

 

모차르트의 외할아버지 볼프강 니콜라우스 페트를의 이름이 붙은 골목길 이정표

 

■난네를

 

모차르트의 누나 난네를은 장크트길겐이 어머니의 고향이라는 걸 어릴 때부터 잘 알면서도 나중에 그곳에 들어가 결혼생활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모차르트의 그늘에 결국 가려지고 말았지만 난네를은 사실 동생 못지않은 음악의 신동이었다. 그녀는 여덟 살 때부터 하프시코드를 배웠다. 하루가 다르게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기술은 완벽에 가까웠다. ‘음악 신동’으로 불렸던 모차르트가 롤 모델로 삼은 사람은 바로 누나였다. 꼭 이겨야 할 경쟁 상대로 생각한 사람도 누나였다.

 

안타깝게도 난네를은 음악가의 삶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녀가 열여덟 살이던 1769년부터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딸을 연주 활동에서 배제했다. 오페라 가수를 제외하면 성인 여성은 음악가로 활동할 수 없는 게 당시 현실이었다.

 

모차르트하우스와 장크트길겐 거리 전경

 

난네를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면서도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결혼을 포기했다. 대신 아버지가 골라 준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결혼을 두 번이나 했고 아이를 다섯 명이나 둔 홀아비였다. 외할아버지의 법원 직원 자리를 물려받은 요한 밥티스트 프라이허였다.

 

난네를이 결혼해서 신혼살림을 차린 곳은 어머니가 태어났던 지방법원 청사였다. 그녀는 공개 연주회에 나갈 수는 없었지만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다. 집에서 하루에 세 시간 이상 피아노를 연습했고, 장크트길겐의 귀족 자녀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도 했다. 가끔 그녀의 실력을 잘 아는 귀족의 초청을 받아 저택에서 개인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난네를은 남편이 1801년 세상을 떠나자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가 아버지를 모시며 여생을 마쳤다. 누나와 달리 모차르트는 장크트길겐에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다.

 

오스트리아 장크트길겐의 명물인 ‘카페 난네를’의 간판

 

■모차르트하우스

 

난네를이 잘츠부르크로 돌아간 뒤 지방법원 청사가 모차르트 가족과 깊은 인연을 가졌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망각의 안개로 덮였다. 이런 놀라운 사실이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은 거의 100년이 지난 1905년이었다.

 

당시 지방법원 판사였던 안톤 마치그가 법원 다락에서 낡은 서류를 발견했는데, 그 서류 기록에 지방법원 청사의 내역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모차르트의 어머니와 누나가 청사에서 살았다는 사실에 감동해 조각가 야코브 그루버에게 안나 마리아와 난네를의 두상을 담은 부조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는 이듬해 8월 두상 부조를 청사에 부착했는데, 부조는 지금도 건물 중앙 벽에 붙어 있다.

 

오스트리아 장크트길겐 모차르트하우스 벽에 붙은 안나 마리아와 난네를 두상 부조

 

법원청사는 이후 안나 마리아, 난네를 기념관인 ‘모차르트하우스’로 바뀌었고, 2005년에는 ‘장크트길겐 모차르트협회’에 소유권이 넘어갔다. 이곳에서는 2008년부터 해마다 모차르트 못지않게 뛰어난 음악가였던 난네를을 기리는 영구 전시회가 진행된다. 이곳은 또 ‘장크트길겐 모차르트 챔버오케스트라’ 공연장으로 사용된다. 건물에 있는 폴켄슈타인 홀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이 진행된다.

 

모차르트하우스 덕분에 장크트길겐은 오스트리아 국내외적으로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됐다. 모차르트하우스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장크트길겐을 맛볼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각종 기념품가게는 물론 식당, 카페, 술집이 이어진다.

 

오스트리아 장크트길겐 공동묘지 전경

 

모차르트하우스 맞은편은 장크트길겐 교회와 공원묘지다. 교회를 지나면 한가운데에 분수가 세워진 작은 광장이 나온다. 분수 앞에는 라트하우스, 즉 시청이라고 적힌 건물이 보인다. 라트하우스 앞에는 난네를의 이름을 붙인 ‘카페 난네를’이 보인다. 벽에는 천사의 보살핌을 받는 난네를의 얼굴이 새겨졌다. 카페 창문에는 난네를의 이름을 붙인 ‘난네를 술’과 황후 엘리자베트의 애칭인 시씨를 붙인 ‘시씨 술’이 전시돼 있다.

 

많은 사람이 이곳에 들어가 커피나 술 한 잔을 마시려고 줄을 선다. 나도 안에 들어가 라떼 한 잔을 시킨다. 종업원은 친절하지도, 그렇다고 불친절하지도 않다. 워낙 많은 사람이 오가기 때문에 정신이 없어 보인다. 창밖으로는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비가 내려 약간 쌀쌀한 날씨에 따뜻한 커피 한 잔만큼 좋은 것은 없다. 잘츠부르크에서 다시 만날 모차르트와 난네를의 인생을 생각하며 달콤한 커피를 입안에 머금어 본다.

 

오스트리아 장크트길겐 ‘난네를 카페’에서 판매하는 난네를 술

 

카페 난네를에서 나와 왼쪽 골목을 따라 1~2분만 걸어가면 모차르트플라츠(모차르트 광장)가 나온다. 광장 한가운데 분수에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청년을 새긴 작은 동상이 설치돼 있다. 청년은 다름 아니라 바로 모차르트다. 그는 장크트길겐에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지만 이곳 사람들은 장크크길겐 사람이었던 볼프강 니콜라우스 페트를의 외손자를 영원히 자랑스러워한다는 뜻에서 동상을 세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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