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의 빈에서는 제국의 몰락이 서서히 진행되었다. 향락과 축제, 달콤한 무위도식이 판을 치면서 영원할 것 같았던 제국의 몰락을 예고하는 듯 불길한 조짐들이 잇따라 일어나고 있었다.
1913년 정월 어느 날 밤, 왈츠의 도시에서 은행 노동자들이 주최한 무도회가 열린다. 대차대조표로 분장한 여자의 몸은 홀쭉한 자산에서 풍만한 부채로 이어져 있었고, 마른 남자는 입금, 뚱뚱한 남자는 출금으로 분장했다. 무도회는 새벽까지 이어졌는데 ‘황제 왈츠’를 연주하던 오케스트라가 갑자기 연주를 멈춘다. 악단이 보수를 받지 못했으니 더 이상 연주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빈은 환상과 현실이 한 치의 틈도 없이 우아한 모습으로 얽혀 있었다. 후일 공산주의 탄생으로 세상을 뒤흔들 인물들이 그 도시에 소리 없이 잠입해 있었다. 그중 하나로 러시아에서 온 반정부 인사는 자신이 만든 잡지를 ‘프라우다’라 불렀다. 그의 시각에서 진리란 곧 혁명을 의미했다. 바로 트로츠키 박사였다. 난방이 전혀 되지 않는 교외의 싸구려 주택에 살면서 유럽 반정부 인사와의 교류에 열심이었다. "빈이 망명지로서 최적은 아니었다. 베를린으로 가고 싶었지만 거기보다는 빈 경찰이 훨씬 느슨했다"고 후일 고백한 바 있다.
당시 스탈린도 빈에 5주 동안 머물렀다. 그가 해외에서 보낸 시간 중 가장 긴 시간이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처럼 재치 있는 말을 늘어놓거나 우아한 미사여구를 사용할 줄도 몰랐다. 잘 차려입거나 기품 있는 몸짓도 할 줄 몰랐다. 스탈린은 사회당 기관지 ‘사회민주주의’에 쓴 글에서 ”허깨비에 입만 살아 있는 챔피언, 우아하고 무능한 트로츠키”라고 그를 비하했다.
합스부르크 왕가 (Habsburg)
합스부르크 왕가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와 함께 중세에서 근세까지 유럽 대륙을 동서로 양분했던 강력하고 호사스러웠던 제국이었다. 그 시작은 서기 1000년경, 신성로마제국 당시 스위스의 아르가우(Aargau)지방, 작은 가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위스 변방의 귀족이었던 이들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 이 지역을 지나가는 상인들에게 통행료를 징수해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다. 게르만의 전통에 따라 황제를 선거로 선출하던 선제후 시절, 황제 가문과 사돈을 맺고 그들 편에 서서 정적들과 맞서 싸우기도 하면서 세력을 키우고 신분도 상승시켰다.
이후 루돌프 1세(1218-1291)가 합스부르크 가문 최초로 황제로 추대된다. 그 배경은 그가 나이가 많은 탓에 정통성은 갖추었지만 다른 가문에 위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반란 세력을 처단하고 오스트리아 지역을 차지하게 된다. 이때부터 650년간 이 가문은 오스트리아를 다스린다. ‘동쪽 땅’을 뜻하는 오스트리아의 역사는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이다.
그런데 이들이 영토를 넓혀 나간 전략이 흥미롭다. 보통 힘을 바탕으로 무자비한 전쟁을 수단으로 하는 데 반해, 이 가문은 정략적인 결혼으로 힘 안 들이고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카를 5세이다.
막시밀리안 1세(재위 1508-1519)가 스페인 왕국 계승권을 겨냥해서 장남 필립(펠리페 1세)을, 콜럼버스를 후원하여 신대륙을 발견하게 했던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 사이에 태어난 공주 후아나와 결혼시킨다. 그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주걱턱으로 유명한 카를 5세(재위 1530-1556)이다. 엄마 후아나가 사망하자 지금의 스페인 왕국을 통째로 물려받아 합스부르크의 영토가 된다.
그 외에도 수많은 정략적 결혼이 지속되었지만, 대표적인 것이 적대관계 해소를 위해 프랑스와의 정략적인 결혼이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란츠 2세(1768-1835)는 프랑스군에 연거푸 패배해 코너에 몰리자 나폴레옹의 제안을 받아 딸 마리 루이즈를 나폴레옹과 결혼시켰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에게 시집갔다가 사치와 낭비의 화신으로 낙인찍혀 단두대에 오른다. 자존심 강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딸답게 죽기 전 신부에게 마지막 고백의 성사를 받으면서 ’지은 죄가 없으니 고백할 것도 없다’면서 당당하게 단두대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어느 왕가나 마찬가지이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의 몰락도 비극적이었다. 재위 68년(1848-1916), 긴 세월을 통치했던 프란츠 요제프(Franz Joseph) 황제의 외아들 루돌프가 부인과의 이혼을 허락받지 못하자, 나이 30에 연인과 함께 사냥별장에 가서 권총 자살한다. 이어서 아들이 없는 탓에 조카로 왕위 계승권을 물려받은 황태자 페르디난트는 1914년 6월 세르비아 사라예보를 방문했다가 암살당해 1차대전을 촉발하고 왕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졌다.
세기말의 빈은 이런 비극적 장면도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여명을 지켜본 역사적인 도시이기도 하다. 이런저런 분야의 천재들이 예술, 학문과 국제정치를 논하며 시대의 전환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베토벤, 슈베르트, 모차르트 등 음악가, 정신분석학의 대가 지크문트 프로이트, 경제학자 칼 맹거와 슘페터,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말살, ‘노예의 길’로 간다”고 일찍이 예언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심지어는 공산주의자 트로츠키와 스탈린 등 수많은 세기적 인물이 빈에 머물거나 살았다.
그런데 빈에 가면 주의할 것이 있다. 그곳에 갔다고 "비엔나 커피 한 잔!"하면서 호기 있게 주문하면 못 알아듣는다. 아이스크림과 생크림 거품을 산처럼 높이 쌓아 올린 커피를, 그곳에서는 “아인스패너 커피(Einspänner Coffee)”라 부르기 때문이다. 옛날 귀족들을 태우고 다니던 마부들이 마차에서 내리지 않고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한 손으로 설탕과 생크림을 듬뿍 얹은 커피를 마신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영토가 쪼그라든 오스트리아의 수도에 지나지 않지만, 빈이 고급스러운 것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적과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를 단순하게 보들보들한 왈츠의 나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이웃 독일과 함께 질서와 규율을 중시하는 강력한 게르만의 나라이다.
빈은 합스부르크이다. 따라서 그곳에 가려면, 합스부르크 왕가를 좀 알고 가야 한다. 또 그곳에는 근세사에 뛰어난 정신적인 유산을 남긴 인물들이 많이 머물다 간 도시라는 사실도 함께 기억해 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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