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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여행]

[오스트리아 여행] 탁월한 경제감각, 음악가이자 혁명가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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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작품을 팔 것이다. 그러나 결코 나 자신을 팔지는 않을 것이다.
- 베토벤 -

 

루트비히 반 베토벤(1770-1827)은 오스트리아 본 태생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클래식 음악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베토벤은 단순한 작곡가를 넘어 클래식 음악의 판도를 뒤흔든 혁명가였다. 대표작 '운명'과 '합창' 교향곡은 지금도 전 세계 콘서트홀을 울리며 청중을 매료시킨다. 9개의 교향곡, 32개의 피아노 소나타, 그리고 수많은 협주곡과 현악 4중주는 후대 음악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다.

베토벤은 당대 음악가 답지않게 혁신적인 비즈니스 감각을 적극적으로 끌어올렸다. 당시 음악가들이 귀족의 후원에 의존하던 시대에, 그는 과감히 자신의 작품을 직접 출판하고 판매했다. 음악가의 경제적 독립과 창작의 자유를 동시에 추구한 혁명가의 모습이다.

 


제2 모차르트의 무게,
운명의 장난에서 피워낸 천재성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궁정음악가인 베토벤은 ‘제2의 모차르트’로 키우겠다는 아버지의 야심하에 엄격한 음악교육을 받았다. 4살 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우고 7살에 이미 첫 공개 무대에 섰고 11살에 첫 작품을 발표했다. 13살 본 선제후(고위 귀족) 궁정의 오르간 연주자로 명성을 이어갔다.


16세 비엔나를 방문해 모차르트를 만났지만,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꿈을 접어야 했다. 6년 뒤 22세가 막스 프란츠의 후원으로 다시 모차르트 제자가 되기 위해 비엔나로 향한다. 하지만 운명은 좀처럼 그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이미 모차르트는 사망한 지 1년이나 지난 상황이었다. 베토벤은 좌절을 새로운 기회로 만들었다. 모차르트는 없었지만, 비엔나 이주는 베토벤에게 새로운 인생의 길을 열어준다.

 


 

구독에서 크라우드 펀딩까지,
깨어난 비즈니스 감각

 

독일의 주간 가정잡기 가르텐라우베 1896년에 실린 월광소나타를 연주하는 베토벤

 

베토벤은 하이든에게 사사하며 자신의 음악적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 여전히 귀족들의 후원은 받았지만, 궁정음악가가 되기는 거부했다. 그러다 25세에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후원으로 3개의 피아노 트리오(Op.1,No.1-3)가 수록된 첫 공식 작품집(Opus 1)을 출판했다.


이를 시작으로 베토벤은 협상 기술을 완성해 최초의 프리랜서 예술가가 됐다. 작품집을 여러 출판사와 동시에 거래해 더 높은 가격을 받아냈고 같은 작품을 여러 나라의 출판사에 판매하기도 했다.

 

특히 첫 작품집의 경우 ‘구독 모델’을 도입했다. 미리 귀족들의 살롱에서 곡의 내용을 공개 연주하는 ‘마케팅’ 활동도 했는데, 이 자리에서 작품집뿐만 아니라 새로운 차기작을 주문받는 ‘선구독’을 진행했다. 1808년에는 ‘아카데미 콘서트’와 같은 대규모 공연을 직접 기획하고 운영했다. 4시간이 넘는 대규모 공연으로 교향곡 5번과 6번, 피아노 협주곡 4번 등 주요 작품들이 초연됐다. 이 공연은 큰 성공을 거두며 베토벤에게 상당한 수입을 안겨줬다.


베토벤은 아카데미 콘서트를 마치고 빈을 떠나 독일로 옮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빈의 귀족들은 대표적인 음악 아이콘이 베토벤을 붙잡아 두기 위해 앞다퉈 후원하기 시작했다. 루돌프 대공, 킨스키 공작, 롭코비츠 공작 등이 각자 700~1500굴덴을 모아 매년 4000굴덴(현재 약 4000만원)을 평생 지원해 준다는 연금과 같은 파격적 조건을 제시했다. 다중 후원 시스템은 미국의 문화예술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패트리온(Patreon)과 유사한 모습이다.

 


 

음악가의 경제 감각
베토벤 형제들의 경제 DNA


베토벤의 음악적 천재성 뒤에는 그의 형제들로부터 영향받은 뛰어난 재정 관리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토벤의 형제들은 각기 다른 분야에서 경제적 역량을 발휘했다.

베토벤의 막내 동생 요한(1776-1848)은 약사로 일하다 후에 지주가 됐다. 현대로 비교하면 부동산 재벌 또는 임대 사업자다. 요한은 잠시 세금 징수원 직책을 맡기도 했다.

둘째 동생 카스파르 안톤 카를(1774-1815)은 회계사로 일하며 때때로 베토벤의 재정 관리를 도왔다. 이러한 가족 배경은 베토벤의 재정 관리 능력과 비즈니스 감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카스파르의 회계 경험은 베토벤의 재정 관리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시대의 베토벤은 서태지?
의외의 평행이론

 

 

베토벤의 예술가로서 독립성을 찾는 모습, 대중과의 소통하는 면은 현 시대의 서태지와 여러 부분에서 닮은 꼴을 갖고 있다.


18세기의 음악 거장 베토벤과 한국 대중음악의 아이콘 서태지는 200년이라는 시간 차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유사점을 보인다. 두 인물은 각자의 시대에 음악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꾼 혁신가로 평가받는다.

베토벤이 당시 관례를 깨고 자신의 작품을 직접 출판하고 판매했듯이, 서태지는 1990년대 중반 한국에서 음악 저작권에 대한 인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두 사람 모두 독립 레이블을 설립해 음악의 제작부터 유통까지 직접 관리했다.


음악적으로도 베토벤의 운명이 나폴레옹 전쟁 시기의 시대정신을 반영했듯,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 '컴백홈' 등은 90년대 한국 사회의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팬들과의 직접 소통, 은퇴 선언 후 복귀 등 그들의 행보 역시 유사한 면을 보인다.


이들의 혁신적인 음악과 비즈니스 모델은 각 시대의 음악 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많은 음악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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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독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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