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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여행]

[오스트리아] 공포를 공통점으로 엇갈리는 화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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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촉망받던 인재가 도망자 신세로

 

 

펠릭스 누스바움이 그린 「유대인 신분증을 든 자화상」이다. 그는 한때 유복한 집안의 도련님으로, 미래가 촉망받는 화가였다. 조국인 독일의 아카데미에서 장학금까지 받는 인재였다. 그래서 이탈리아로 유학길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그다음 해, 나치가 독일 정권을 쥐고 유대인에 대한 광기를 보일 줄은.

 

선전물을 그리는 나치 앞잡이로 나선다면 위태롭게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누스바움은 비겁한 선택을 하는 대신 유대인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프랑스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전염병과 영양실조, 죽음을 목격했다. 하지만 누스바움은 굴복하지 않았다. 수송 열차를 타고 독일의 가스실로 끌려가던 날, 철로에서 용감하게 몸을 던졌다. 그렇게 벨기에로 돌아가서 아내를 다시 만났다.

 

부부는 나치에 저항하는 지하운동 단체 일원의 집 다락방에 얹혀살았다. 집주인이 준 위조 배급 카드 덕에 밥을 타 먹을 수 있었는데, 겨우 밖을 나설 때마다 살 떨리는 긴장감을 안아야 했다. 이쯤에 그린 그림이 위의 「유대인 신분증을 든 자화상」이다.

 

퀭한 눈과 굳은 입술, 경직된 손, 바짝 세운 옷깃은 그림 속의 남자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짙게 깔린 먹구름과 금이 간 벽, 가지 잘린 나무 등이 공포를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슬쩍 보이는 파란 하늘과 하얀 꽃은 놓을 수 없는 작은 희망을 의미한다.

 

하지만 누스바움은 안타까운 최후를 맞게 된다. 고작 마흔 살에, 연합군이 그들이 살던 지역을 해방하기 겨우 한 달 전에, 나치 친위대에게 붙잡혀서 아우슈비츠행 열차를 타게 된다. 그리고 누스바움의 사후에 그림들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나치에게 발각되지 않은 덕에 후대의 사람들이 누스바움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나치마저도 감탄하고 살려준 그림

 

반면에 나치에게 발각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그림도 있다.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Ⅰ」이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1년 전,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 합병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인종 청소에 나섰다. 그리고 돈 많은 유대인 페르디난트는 핵심 표적이었다. 거듭되는 압박에 페르디난트는 클림트의 그림을 포함해서 가진 재산을 놔둔 채로 스위스로 피신했다.

 

당시 전체주의 기조였던 나치는 개성 강한 예술에 '퇴폐'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마구 찢고, 밟고, 불태웠다. 클림트와 그의 뜻을 따른 에곤 실레, 오스카어 코코슈가의 작품이 대표적 희생양이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가 소지하고 있던 클림트의 그림만큼은 살려줬다. 물품을 챙기러 온 나치 일당들은 입을 벌렸다. 그림은 황홀할 만큼 아름다웠다. 금박과 색색의 유리를 쏟아부은 작품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나치의 수뇌부는 유대인 여인의 이름이 쓰인 해당 그림을 「우먼 인 골드」라고 새로 명명하며 각별히 여겼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궁금해질 것이다. 나치에 의해 이름을 빼앗긴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대체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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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독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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