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문학가들이 미발표 원고나 미완성 작품을 없애달라고 당부하는 일이 드물지는 않다. 프란츠 카프카(1883~1924)도 그랬다. 자신이 죽은 뒤 원고와 편지, 일기 등을 모두 불태워 달라는 그의 부탁은 이뤄지지 않아 더욱 유명하다. 불태워지기는커녕 차례로 출간되어 그가 생전에 누리지 못했던 명성을 사후에 안겨줬다. 그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막스 브로트(1884~1968). 카프카와 대학 시절부터 20여 년 우정을 나눈 친구다. 일찌감치 카프카의 재능을 알아본 브로트는 친구의 유언을 배신하고 친구의 문학을 살려낸 사람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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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브로트가 관리하던 카프카 유고를 둘러싸고 21세기에 벌어진 소송에 대한 이야기다. 카프카는 현재 체코의 수도이자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던 프라하에서 살다가 폐결핵으로 1924년 41세에 숨졌는데, 소송은 뜻밖에도 이스라엘에서 벌어졌다. 사연은 이렇다. 브로트는 나치가 국경을 봉쇄하기 직전 카프카 유고를 챙겨 프라하를 떠났고 이후 현재의 이스라엘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자식이 없던 그는 원고 정리 등 비서 역할을 한 에스페르 호페라는 여성에게 생전에 카프카 유고를 준 것을 비롯해 모든 재산을 남겼다. 에스페르가 2007년 숨진 뒤 에바 호페 등 두 딸이 이를 상속하려 하자,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그렇게 시작된 재판에는 또 다른 나라의 문학기관도 등장한다. 호페 집안으로부터 카프카 유고를 인수하려 했던 독일 마르바흐 아카이브다.
지은이는 소송 얘기와 번갈아 브로트와의 관계를 비롯해 카프카의 삶과 그 유고가 거쳐온 여정을 상세히 전한다. 내향적이고 자기 작품에 확신이 없던 카프카와 달리 브로트는 외향적인 동시에 다작의 작가였다. 유럽의 이름난 문인들과 교류했을 뿐 아니라 피아노를 치며 아인슈타인과 바이올린 소나타를 협연한 적 있다는 얘기도 흥미롭다. 사뭇 다른 두 사람의 우정을 지은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안에서는 체코인이라는 비주류, 체코인들 사이에서는 독일어 사용자라는 비주류, 독일어 사용자들 사이에서는 유대인이라는 비주류에 속한다는 괴로운 경험을 공유”한 사이로도 표현한다. 무엇보다 브로트는 천재를 알아본 범재였다. 물론 카프카 작품의 출간 및 편집이나 작품에 대한 해석과 관련해 브로트는 이후 여러 비판을 받기도 했다.
소송은 이런 카프카에 대한 여러 시각, 특히 한편에서는 그를 유대 문학 작가로, 다른 한편에서는 독일 문학 작가로 보려 한다는 점을 알려준다. 이 책은 문학적 해석 등만 아니라 참고할 만한 여러 사실을 언급한다. 이를테면 사후 카프카의 작품은 브로트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나치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이들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카프카의 여동생들은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숨졌다. 한편으로 카프카는 뒤늦게 히브리어를 공부했지만, 그렇다고 브로트처럼 시온주의로 전향하지는 않았다. 지은이는 독일, 프랑스, 미국 등의 카프카 열풍과 달리 이스라엘에서는 전집조차 출간되지 않았다는 점도 전한다.
결국 소송이 불러낸 질문은 카프카 같은 위대한 작가의 문학적 유산이 과연 누구의 것이냐로 모아진다. 이런 와중에 자료의 소장처에 따라 관련 자료가 전혀 공개되지 않고 연구자들의 접근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등장한다. 최종적으로 패배한 쪽은 에바 호페였다. 에바의 언니는 소송이 시작된 이후 암으로 숨졌고, 에바도 최종 판결 이후 세상을 떠났다. 카프카 유고는 보상 한 푼 없이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으로 갔다. 소송의 전말과 더불어 이 책은 카프카의 사후 그의 문학이 지금처럼 자리매김하게 된 구체적인 과정들에 대해서도 상세히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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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독일어
오스트리아 현지 독일어 학원 & 유학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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