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럽인은 물론 유럽인도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오는 6월 6~9일 유럽의회 선거가 진행된다. 이 선거에서 향후 5년 동안 유럽의 행보를 이끌 720명의 의원을 선출한다. 유럽의회 선거의 인기는 많지는 않다. 지난 2019년 선거에서는 유권자의 절반 정도인 2억여 명만 선거에 참여했다. 참고로 그해 선거 한 달 뒤 열린 맨체스터시티와 밀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시청자 수와 비슷하다.
하지만 유럽의회 선거에 대한 교황청의 관심은 각별하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교황청은 이번 선거를 통해 더 강력한 유럽연합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만일 현재의 여론조사대로 도널드 트럼프가 다시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교황은 유럽이 국제무대에서 더 적극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현재 프랑스와 독일, 오스트리아를 포함해 여러 유럽 국가에서 유럽연합에 회의적인 정당이 득세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청은 유럽연합이 서서히 사라지는 대신 중도파가 결집해 유럽연합을 지탱해 주길 바라고 있다.
지난 5월 초 이탈리아주교회의 의장 마테오 추피 추기경과 유럽연합주교회의위원회(COMECE) 의장 마리아노 크로치아타 주교가 발표한 서한에는 교황청의 이런 의중이 담겨 있다. 먼저 서한의 내용보다도 중요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COMECE에 직함이 없는 추피 추기경이 서명한 것이다. COMECE 의장은 크로치아타 주교이지만 그는 이탈리아의 한 작은 교구 교구장에 불과하다. 추기경의 서명이 필요했다. 게다가 추피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평화 특사’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서 교황의 대리자 역할을 했고 유력한 차기 교황 후보이기도 하다. 또 서한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이 인용돼 있어 교황의 의중이 담겨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두 번째는 유럽연합을 마치 한 사람인 양 표현했다는 것이다. 추피 추기경과 크로치아타 주교는 서한의 시작 부분에 유럽연합을 향해 이탈리아어로 2인칭을 뜻하는 ‘tu’를 썼다. ‘tu’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친구나 가족같이 편한 사이에 쓰는 말이다. 의도적으로 유럽연합에 애정을 표현한 것이다.
추피 추기경과 크로치아타 주교는 “유럽연합에게 ‘너’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이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너’와 함께 성장했기에 당연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사실 두 사람은 전후 통합된 유럽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크로치아타 주교는 유럽 통합의 토대가 된 ‘쉬망 선언’(Schuman Declaration) 3년 후인 1953년 태어났고, 추피 추기경은 1955년 생이다.
추피 추기경과 크로치아타 주교가 발표한 서한의 요지는 가톨릭교회, 더 나아가 교황청은 유럽연합과 특별한 연대감을 느끼고 있다는 내용이다. 우크라이나와 가자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이주와 인간 생명 보호와 같은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 특히 추피 추기경과 크로치아타 추기경은 “국수주의의 유혹”에 반대했다. 또 “지금은 연합에서 더욱 완전한 통합을 향해 나아가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특히 두 고위 성직자는 미국과 영합하지 않고 유럽만의 확고한 외교 정책을 펼칠 것을 주문했다.
역사적으로 교황청은 오랫동안 외교무대에서 ‘강대국’의 지위를 누렸다. 신성로마제국부터 주요 가톨릭국가의 교섭 상대이자 동맹국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미국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프란치스코 교황 이후 교황청은 미국만을 바라보던 기조에서 벗어나 좀 더 다극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실제로 교황청은 미국이나 나토(NATO)보다는 브라질과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브릭스(BRICS)를 더욱 가까이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은 여전히 교황청의 주요 대화 상대국이다. 우크라이나 무장이나 이스라엘 지원 등에서 교황청과 미국의 입장은 다르지만, 이주와 기후변화 등 사회정의 측면에서는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하지만 만약 트럼프가 재선된다면 교황청은 사회정의 분야에서 자신의 입장을 지지할 새로운 ‘강대국’을 찾아야 한다.
최근 유럽 외교위원회의 이반 크라스테프와 마크 레너드는 이번 선거에서 중도파가 득세한다면 유럽연합이 강화될 것이고 트럼프의 대항마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유럽의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모두 트럼프의 재선 가능성에 실망감을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라스테프와 레너드는 “트럼프의 재선 가능성에 따라 유럽의 유권자들은 유럽 통합이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더 느끼게 될 것”이라며 “트럼프는 유럽의 안보 보장에 적극적이지 않아 유럽인들이 유럽연합에 더 의지하게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이는 바로 추피 추기경과 크로치아타 주교,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라는 바다. 6월 10일이 되면 이 전략이 잘 통하게 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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