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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여행]

[오스트리아 여행] 대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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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 여행에서는 합스부르크 왕조 말고도 꼭 알아야 할 화가가 구스타프 클림트다. 오스트리아에는 유명 화가가 많지만 클림트를 능가할 이는 없다. 오스트리아 여행을 하다 보면 클림트의 그림을 이용한 기념품 숍들이 즐비하다. 클림트의 대표 작품인 ‘키스’는 발에 치일 정도로 많이 보게 된다. 자연히 클림트는 누구인가를 궁금해 할 수밖에 없다.

 

금 세공사의 가난한 아들로 태어나 자수성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그림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다. 거리, 기념품 숍에서도 그의 그림이 찍힌 물건들은 즐비하다. 클림트는 지금도 앞으로도 오스트리아 예술의 간판스타다. 그의 그림에 나왔던 모티프들은 다양한 상품으로 둔갑해 관광객들을 계속 유혹할 것이다.

클림트라는 화가는 몰라도 ‘입맞춤(The Kiss, 1907~1908 작)’이라는 금색의 몽환적인 작품은 눈에 익다. 여성의 숨결이 섬세하게 느껴지는 그의 그림 색에 걸맞게 각양각색으로 만든 기념품은 너무나 현혹적이어서 주머니 사정 얄팍한 여행객들을 사라고 부추긴다.

 

이렇게 여성의 감성을 녹아내리는 그의 삶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를 알기 위해 존 말코비치가 분한 <클림트>(Klimt, 2006)라는 영화와 클림트의 그림속의 주인공이었던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Portrait of Adele Bloch-Bauer, 1907)의 작품에 얽힌 비화를 다루고 있는 <우먼인골드>(Woman in gold, 2015)를 본다. 특히 클림트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 것은 BBC의 다큐 작품인 <세계 명화의 숨겨진 이야기>의 ‘클림트의 키스’ 편이다.

공식적으로 드러난 그에 대한 자료에 따르면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바움가르텐(Baumgarten)에서 태어났다. 체코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그의 아버지는 이름 없는 가난한 금세공사이며 판화가였다. 그의 어머니는 오페라 가수가 꿈이었지만 여섯 명이나 되는 자식들로 인해 꿈을 포기해야 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미술을 좋았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미술을 제대로 배울 수 없었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의 추천과 도움으로 14세(1876년) 때, 빈 응용미술학교에서 회화와 수공예적인 장식 교육을 받았다.

1883년 졸업 후에는 그의 동생 에른스트(Ernst)와 동료 학생인 프란츠 마치(Franz Matsch)와 함께 공방을 차려 공공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 그러다 그의 인생에 전환기를 맞게 되는데 바로 부르크 극장을 장식하는 작업(1886~1888)이었다. ‘구 부르크 극장의 관객석’에 등장하는 초상화는 보는 이들을 경탄케 했다. 이 작업으로 프란츠 요세프 국왕에게 특별 격려상인 황금공로십자훈장을 받게 되었다. 그때부터 빈의 유명인사가 되었고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루마니아 왕궁의 벽, 체코슬로바키아의 온천 천장화까지 주문을 의뢰받게 된다.

 



빈 분리파 결성


그러다 1892년 동생 에른스트가 죽었고 그 충격으로 정신적인 공황에 빠졌다. 1895년 그가 다시 붓을 들기 시작했을 때는 그의 화풍도 달라진다. 인상파와 상징주의 등 다양한 아방가르드(avant-garde, 전위파 예술가들)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97년 보수적인 미술 단체를 벗어나 ‘빈 분리파’를 결성해 초대회장으로 추대된다. 분리파란 뜻은 로마인들이 사용하던 라틴어구 ‘성스러운 산에서 평민의 분리’에서 유래했다. 에곤 실레(Egon Schiele),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칼 몰(Carl Moll), 오토 바그너(Otto Wagner) 등 당대 오스트리아를 선도한 화가, 디자이너, 건축가들이 빈 분리파에 참여했다. 클림트는 분리파 활동을 하면서 전시회, 잡지 등을 창간했다.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대 성공을 거두었고 번 돈으로 ‘분리파 관(Secession Hall, 1897-1898)을 지었다. 건축가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가 만든 이 건물은 오늘날에도 빈의 문화적 상징물이 되었다.

 

1902년 제14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분리파 역사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 전시회는 천재 음악가 베토벤에게 헌정되었는데, 백미는 클림트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모티프로 그린 벽화 <베토벤 프리즈>였다. 하지만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 응용미술의 극치였지만 당시에는 많은 이들은 향락과 무절제가 그려진 이 작품에 대해 반감을 일으켰다. 거기에 클림트가 분리파의 탈퇴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또 생긴다. 클림트는 빈 대학의 철학, 의학, 법학 부분의 벽화를 맡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이 완성(1900~1903)되었을 때 빈의 미술계는 뜨거운 스캔들에 휩싸이게 된다. 화풍의 외설성으로 인해 빈 대학교 교수들과 정면 충돌하는 사태를 빚었다. 그의 인기는 식어갔고, 빈 분리파 안에서도 지지를 잃었다. 클림트는 1905년, 빈 분리파를 탈퇴했다.


에로틱, 강렬한 상징주의, 창조적인 예술세계


분리파의 탈퇴 후 오히려 그는 자기만의 색깔을 넣은 작품들을 만들 수 있었다. 누군가와 어울리는 것도 타협하는 것도 원치 않던 그는 에로틱, 강렬한 상징주의, 창조적인 예술세계에 몰두하면서 자기 세계를 국축해 나간다. 이때부터 클림트는 이탈리아 라벤나의 모자이크와 장식적인 패턴, 금을 사용해 눈에 띄는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가 금을 이용해 모자이크 작업을 펼칠 때 아버지의 수공예품에 대한 기억이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키스’(1907~1908),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1907), ‘다나에’(1907~1908), ‘아담과 이브’(1917~1918) 등 황금 시기의 대작을 만들어낸다.

 


1918년 1월 11일, 클림트는 56세 때, 갑작스런 뇌출혈이 있었고 그 해 2월 6일 일련의 합병증으로 병원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는 사후 50년 후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언제부턴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클림트는 호색한?


BBC의 다큐에 따르면 클림트는 ‘호색한’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엄마와 함께 살았다. 그의 엄마는 아들이 그림을 그렸다고만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숨겨 놓은 자녀들이 두 명 혹은 세 명이 있고 그가 죽은 후에도 14명의 여인들이 친자확인에 나섰다. 그중 4명은 친자로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작업실에 박혀 그림에만 몰두한 그가 어떻게 호색한이 되었을까? 그는 작업실에서 일할 때면 항상 헐렁한 작업복을 입었고 작업복 속에는 속옷을 입지 않았다. 모델이었던 거의 모든 여자들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전해졌다.

그의 인생에서 세 명의 여자가 크게 좌우한다. 첫 번째는 에밀리 플뢰게(Emilie Floege, 1874~1952)다. 클림트보다 12살 어린 그녀는 클림트의 남동생 부인의 여동생으로 즉 사돈이다. 글쓰기를 그리도 싫어했던 그가 그녀에게는 약 400통의 편지를 보냈단다. 거기에 클림트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도 그녀부터 찾았고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었다. 클림트가 죽은 후 플뢰게는 많은 서신들을 태워 그의 비밀을 없앴고 재산을 정리해 클림트의 자식들을 낳은 여인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기도 했다. 1952년 세상을 뜰 때까지 클림트의 추억을 안고 살았다.

두 번째 여인은 클림트의 애까지 낳았던 짐머만(Zimmermann)이 있다. 유대인이었으며 가구공의 딸이었던 그녀는 클림트를 찾아와 모델이 되었고 2명(혹은 3명)의 애를 낳았다. 빈민가에서 살아갔다. 클림트도 애를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자유를 원해서였든, 마마보이였든, 변화를 싫어했든, 클림트는 결혼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둘째 아이가 죽고 나서 어디로 사라져 버렸고 행방은 알 수 없다. 세 번째는 클림트 그림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다. 그녀는 돈 많은 남편이 있었고 그 남편이 그녀의 초상화를 원했다고 한다.

클림트가 좋아하는 여성 스타일은 공통점이 있다. 유대인이거나 날씬하고 빨간 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그냥 후대에서 재조명한 내용들이다. 클림트는 수수께끼 같은 화가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그림에 대해 한 번도 설명한 적이 없고 인터뷰도 하지 않았으며, 자서전도 없으며 그 흔한 자화상도 그리지 않았다. 그의 그림 ‘키스’의 주인공은 현재까지도 누구냐에 대해서 의견만 분분하다.


클림트 그림 찾아내기


빈에서 클림트의 그림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은 앞서 소개한 벨베데르(Belvedere) 궁전(1721년)이다.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상 궁전에는 클림트의 명작 ‘키스’, ‘유디트’ 그리고 인상파 화가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빛도 그림자도 없는 아름다운 전원을 그린 초기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쇤부른 궁전에서도 볼 수 있다.

 


빈 미술사박물관에는 천장화나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화, ‘구왕궁극장의 관객석(1888년)’등을 만날 수 있다. 또 분리파 건물인 제체시온(Secession, 1898년)의 지하엔 클림트의 프레스코화인 ‘베토벤 프리즈(Beethovenfries)’가 있다.

 


클림트와 제체시온 (Secession)


빈의 카를플라츠 지하철 주변에는 제체시온(분리파) 홀(Secession)이라는 독특한 건물이 있다. 제체시온은 1897년 4월 3일 빈의 전시관인 퀸스틀러하우스(Künstlerhaus)의 보수주의 성향에 불만을 가진 예술가들이 퀸스틀러하우스를 탈퇴하면서 결성된 것이 빈 분리파다. 회화, 조각, 공예, 건축 등의 여러 예술가들이 참가했다.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 Klimt, 1862~1918)가 초대회장이 되었다. 이들의 활동 거점으로 삼기 위해 1898년, 당대의 유명 건축가인 오토 바그너(O. Wagner, 1841~1918)의 제자인 건축가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Joseph Maria Olbrich, 1867~1908)가 설계한 전시관이 제체시온이다. 신 아트 스타일(프랑스에서는 아르누보, 독일에서는 유겐트스틸(Jugendstil)) 건축물이다.

 

전시관 입구에는 ‘시대에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이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1903년에는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이 빈 공방을 설립했지만 순수 예술을 지향했던 회원들은 빈 분리파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된다. 1905년 구스타프 클림트 등이 탈퇴하면서 빈 분리파는 소멸되고 만다.

현재 이 건물의 지하에서는 클림트의 34m의 프레스코 벽화인 ‘베토벤 프리즈(Beethovenfries)’를 볼 수 있다. 베토벤 9번 교향곡 마지막 악장인 ‘환희의 송가’를 표현한 것. 제체시온 개막식 때,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가 이끄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금관악기 주자들이 ‘환희의 송가’를 이 방에서 연주했다고 한다.


카를플라츠 (Karlsplatz) 역사


또 제체시온 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금색 해바라기 모양의 카를플라츠 지하철 역사(Karlsplatz Stadtbahn-Pavilion)가 있으니 함께 여행하자. 쌍둥이 역사 두 개가 마주하고 있다. 1899년, 아르누보 건축의 대가 오토 바그너(Otto Wagner, 1841년~1918년)의 작품이다. 두 개의 역사 중 동쪽은 현재 카페이고 서쪽의 것은 박물관이다. 오토 바그너는 오스트리아의 건축가로, 제체시온(Sezession:分離派) 운동의 시조이며 간소하고 실용적인 건축 양식을 주장했다. 또 오토 바그너의 화려한 장식을 볼 수 있는 마졸리카 집(Majolica House)의 건물(Linke Wienzeile)이 제체시온 홀에서 멀지 않다. 1898~1899년에 지어진 빈의 세 아파트 건물의 치장이 여전히 매우 화려해서 자꾸만 눈길을 끌어당긴다.


카를 성당 (Karlskirche)


카를 광장에는 카를 성당이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바로크식 건축물 하나로 손꼽힌다. 18세기 초반, 유럽을 휩쓴 페스트가 빈에서 물러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1713년 카를 6세가 바로크양식 건축가 요한 피셔 폰 에를라흐(Johann Bernhard Fischer von Erlach)에게 지시해 1737년에 완공했다. 에를라흐는 60세 되던 1716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을 시작했고, 1737년 그의 아들이 완성했다. 이탈리아의 추기경이자 가톨릭 개혁에 앞장선 성 카를로 보로메오(Carlo Borromeo)에게 헌정되었다.

돔 지붕 형태의 본당은 높이가 72m인데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을 본뜬 것이라고 하며, 돔의 푸른색은 천장 내부에서 칠한 것이다. 본당 앞에 좌우로 서 있는 높이 33m의 원기둥은 그리스 신전의 기둥과 비슷한 형태인데 성 보로메오의 삶을 나타낸 것이며 이탈리아 로마의 트라야누스(Trajanus) 기념비를 본뜬 것이다.

건물 내부의 천장화와 대리석으로 만든 기둥, 벽화 등이 아름답고, 성당 앞의 거리 공간은 20세기 최고 조각가로 꼽히는 헨리 무어(Henry Moore)가 재설계했다. 빈 국립대학교 공과대학이 가까이에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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